머큐리 계획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머큐리 계획은 1950년대 후반 미국이 소련과의 우주 개발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시작한 최초의 유인 우주 비행 프로그램이다. 이 계획은 7명의 우주 비행사(머큐리 세븐)를 선발하여 훈련시키고, 머큐리 우주선과 발사체를 개발하여, 탄도 비행과 지구 궤도 비행을 수행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머큐리 계획은 비록 소련에 비해 늦게 시작되었지만, 미국의 국위 선양과 과학 기술 발전에 기여했으며, 후속 우주 개발 계획인 제미니, 아폴로 계획의 토대가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머큐리 계획 - 존 글렌
존 글렌은 미국의 우주비행사이자 정치인으로, 1962년 최초로 지구 궤도 비행을 한 미국인이며, 해병대 조종사, 시험 조종사, NASA 우주비행사로서 활약했고, 이후 오하이오주 상원의원을 지냈으며, 77세에 두 번째 우주 비행을 한 인물이다. - 머큐리 계획 - 머큐리-아틀라스 6호
머큐리-아틀라스 6호는 1962년 존 글렌이 탑승하여 미국 최초의 유인 지구 궤도 비행에 성공한 임무이며, 소련과의 우주 개발 경쟁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 1962년 우주 개발 - 존 글렌
존 글렌은 미국의 우주비행사이자 정치인으로, 1962년 최초로 지구 궤도 비행을 한 미국인이며, 해병대 조종사, 시험 조종사, NASA 우주비행사로서 활약했고, 이후 오하이오주 상원의원을 지냈으며, 77세에 두 번째 우주 비행을 한 인물이다. - 1962년 우주 개발 - 스콧 카펜터
미국의 해군 장교이자 우주 비행사인 스콧 카펜터는 NASA 머큐리 계획에 참여하여 1962년 머큐리-아틀라스 7호로 지구 궤도를 세 바퀴 돌았으며, 이후 해군 SEALAB II 프로젝트에서 해저 생활을 했다. - 1963년 우주 개발 - PGM-17 토르
PGM-17 토르는 미국이 개발하여 영국에 배치, 소련 핵 공격 임무를 수행한 중거리 탄도 미사일로, 후에 델타 로켓으로 발전하여 우주 발사체 개발에 기여하고 대한민국 로켓 개발에도 영향을 주었다. - 1963년 우주 개발 -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발렌티나 테레시코바는 1963년 보스토크 6호를 타고 지구 궤도를 비행하여 세계 최초의 여성 우주 비행사가 된 소련의 우주 비행사이자 정치인이며, 소련 붕괴 후에는 러시아 하원 의원을 역임했고, 2020년 러시아 헌법 개정안 발의에 참여하기도 했다.
머큐리 계획 | |
---|---|
개요 | |
이름 | 머큐리 계획 |
영어 이름 | Project Mercury |
목표 | 유인 궤도 비행 |
상태 | 완료됨 |
기간 | 1958년 – 1963년 |
국가 | 미국 |
조직 | NASA |
비용 | 2억 7700만 달러 (1965년) |
비용 (인플레이션 조정) | 2,770,000,000 달러 (인플레이션 조정) |
성공 횟수 | 11 |
실패 횟수 | 3 (MA-1, MA-3, MR-1) |
부분적 실패 횟수 | 1 (빅 조 1호) |
발사 장소 | 케이프커내버럴 월롭스 |
탑승체 | 머큐리 캡슐 |
발사체 | 아틀라스 LV-3B 빅 조 블루 스카우트 II 리틀 조 머큐리-레드스톤 |
후속 계획 | 제미니 계획 및 아폴로 계획 |
경쟁 계획 | 보스토크 계획 (소비에트 연방) |
임무 | |
최초 비행 | 빅 조 1호 1959년 9월 9일 |
최초 유인 비행 | 머큐리-레드스톤 3호 1961년 5월 5일 |
마지막 비행 | 머큐리-아틀라스 9호 1963년 5월 15일 |
우주선 | |
우주 비행사 | 스콧 카펜터 고든 쿠퍼 존 글렌 거스 그리섬 월리 시라 앨런 셰퍼드 디크 슬레이턴 |
탑승 인원 | 1명 |
2. 역사적 배경
1957년 10월 4일 소비에트 연방(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한 것에 대항해 1958년 미국에서 머큐리 계획이 시작되었다. 이 계획은 미 육해공군에서 우주비행사 후보자를 선발해 훈련하고, 로켓과 머큐리 우주선을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머큐리'라는 이름은 로마 신화의 신 머큐리(수성)에서 따왔으며, 유인 머큐리 우주선에 붙은 "7"은 우주비행사 후보자가 7명이었던 것에서 유래한다.[7]
1958년 10월 1일,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설립되어 군사 부문을 제외한 우주 개발을 육해공군으로부터 이어받아, 정부 지원하에 유인 우주비행을 추진했다. 그러나 소련은 유리 가가린을 통해 1961년 4월 12일 인류 최초의 유인 우주비행을 성공시켰다. 미국은 1961년 5월 5일 앨런 셰퍼드의 머큐리 3호(프리덤 7호)로 탄도 비행에 성공했지만, 궤도 비행은 1962년 2월 20일 존 글렌의 프렌드십 7호가 최초였다.[8]
이후 머큐리 계획은 1963년까지 총 6회의 유인 비행을 완료하고 종료되었다.[8]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5월 15일 "1960년대 안에 달에 유인 비행을 실시한다"라고 선언했고, 머큐리 계획의 성과는 제미니 계획과 아폴로 계획으로 이어졌다.[9]
2. 1. 냉전과 우주 경쟁
1957년 10월 4일 소비에트 연방(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자, 미국은 "미사일 격차"에 대한 우려에 빠졌다.[1] 이러한 상황은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 간의 치열한 우주 경쟁을 촉발시켰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은 핵무기 경쟁을 벌였다.[2] 소련은 서반구에 폭격기를 배치할 기지가 없었기 때문에 대륙간 탄도 미사일 개발을 추진했고, 이는 미사일 경쟁으로 이어졌다.[2] 로켓 기술 발전은 양국이 통신, 기상 데이터 수집, 정보 수집을 위한 지구 궤도 위성을 개발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3]
소련이 스푸트니크 2호에 개를 태워 발사하면서 유인 우주 비행의 가능성을 시사하자, 미국은 유인 우주 비행 계획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다.[4] 이에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민간 우주 기구 설립을 지시했고, 전미 항공 자문 위원회(NACA)를 기반으로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설립되었다.[5] NASA는 1958년 파이오니어 1호를 발사하며 첫 목표를 달성했고, 다음 목표는 인간을 우주로 보내는 것이었다.[6]
머큐리 계획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58년에 시작되었다.[7] 이 계획은 미 육해공군에서 우주비행사 후보자를 선발하고 훈련하는 동시에, 로켓과 머큐리 우주선을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소련은 유리 가가린을 통해 1961년 4월 12일 인류 최초의 유인 우주비행을 성공시켰다.[8] 미국은 1961년 5월 5일 앨런 셰퍼드의 머큐리 3호(프리덤 7호)를 통해 탄도 비행에 성공했지만, 궤도 비행은 1962년 2월 20일 존 글렌의 프렌드십 7호가 최초였다.[8]
이후 머큐리 계획은 1963년까지 총 6회의 유인 비행을 성공적으로 완료하고 종료되었다.[8]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5월 15일 연설에서 1960년대 안에 달에 유인 비행을 실시하겠다고 선언했고,[9] 머큐리 계획의 성과는 제미니 계획과 아폴로 계획으로 이어졌다.[9]
2. 2. NASA 설립과 머큐리 계획
1958년 10월 1일,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설립되어, 군사 부문을 제외한 우주 개발을 육해공군으로부터 이어받아 정부의 지원을 받아 유인 우주 비행을 추진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머큐리 계획은 NASA 설립 직후인 1958년 10월 7일에 공식 승인되었고, 12월 17일에 대중에게 발표되었다.소련이 1957년 10월 4일 첫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자, 미국은 "미사일 격차"에 대한 우려에 빠졌다. 이에 미국은 1958년 머큐리 계획을 시작했다. 원래는 우주비행사 계획(Project Astronaut)이라고 불렸지만,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조종사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신, 머큐리라는 이름이 고전 신화에서 따왔다. 이는 이미 그리스의 아틀라스와 로마의 유피테르와 같은 이름을 SM-65 및 PGM-19 미사일에 부여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국과 소련 사이에는 핵무기 경쟁이 벌어졌다. 소련은 서반구에 폭격기를 배치할 기지가 없었기 때문에 요시프 스탈린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개발하기로 결정했고, 이는 미사일 경쟁을 촉발했다.[1] 로켓 기술은 양측 모두 통신, 기상 데이터 수집 및 정보를 위해 지구 궤도 위성을 개발할 수 있게 했다.[2]
T. 키스 글레난은 1958년 10월 1일 NASA가 창설될 당시 초대 NASA 국장으로 임명되었고, 휴 L. 드라이든(NACA의 마지막 국장)이 부국장으로 임명되었다.[3] 글레난은 국가 항공 우주 위원회를 통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4] 머큐리 계획을 담당하는 조직은 NASA의 우주 임무 그룹이었으며, 이 프로그램의 목표는 유인 우주선을 지구 궤도에 올리고, 우주에서 조종사의 능력 연구하고, 조종사와 우주선을 안전하게 회수하는 것이었다.[5]
3. 조직 및 시설
1958년 10월 1일,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정식 발족되었으며, T. 키스 글레난이 초대 청장, 휴 드라이든이 부청장으로 임명되었다. 머큐리 계획은 NASA 내 '우주 태스크 그룹'이 담당했으며, 유인 우주선 발사, 우주 비행사의 능력 관찰, 안전 귀환을 목표로 했다.[3]
머큐리 우주선 제작에는 12개 회사가 입찰에 참여했으며, 1959년 1월 맥도넬 항공기가 주 계약자로 선정되었다.[4] 노스 아메리칸 항공은 발사 탈출 시스템 개발용 리틀 조 로켓 계약을, 웨스턴 일렉트릭은 세계적인 추적 네트워크 구축 계약을 맺었다.[5][6] 준궤도 발사용 레드스톤 로켓은 크라이슬러가, 아틀라스 로켓은 컨베어가 제조했다.[7][8]
회사명 | 역할 |
---|---|
맥도넬 항공기 | 우주선 제작 주 계약 |
노스 아메리칸 항공 | 리틀 조 로켓 제작 |
웨스턴 일렉트릭 | 세계적인 추적 네트워크 구축 |
크라이슬러 | 레드스톤 로켓 제작 |
컨베어 | 아틀라스 로켓 제작 |
우주선은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맥도넬 항공기의 클린룸에서 제작 및 테스트되었고,[9] 약 600개의 하청업체가 참여했다. 최종 품질 관리 및 준비는 케이프 커내버럴의 격납고 S에서 이루어졌다. NASA는 20대의 우주선을 주문했으며, 이 중 일부는 비행하지 않거나 파괴되었다. 여러 대의 보일러플레이트 우주선도 제작되어 테스트에 사용되었다.
3. 1. 주요 조직
T. 키스 글레난은 1958년 10월 1일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창설될 당시 초대 NASA 국장으로 임명되었고, 휴 L. 드라이든(국가항공자문위원회(NACA)의 마지막 국장)이 부국장으로 임명되었다.[1] 글레난은 국가 우주 위원회를 통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2] 머큐리 계획을 담당하는 조직은 NASA의 우주 임무 그룹이었으며, 이 프로그램의 목표는 유인 우주선을 지구 궤도에 올리고, 우주에서 조종사의 능력을 연구하고, 조종사와 우주선을 안전하게 회수하는 것이었다.[3]3. 2. 주요 시설
머큐리 계획에는 다양한 시설이 사용되었다. 유인 발사를 위해 플로리다주 케이프 커내버럴 공군 기지의 대서양 미사일 기지가 미국 공군에 의해 제공되었다. 이곳은 머큐리 제어 센터가 위치한 곳이기도 했다. 통신 네트워크의 컴퓨팅 센터는 메릴랜드주 고다드 우주 비행 센터에 있었다. 리틀 조 로켓은 버지니아주 월롭스 섬에서 발사되었다.우주 비행사 훈련은 버지니아주 랭글리 연구 센터,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루이스 비행 추진 연구소(현 글렌 연구 센터), 펜실베이니아주 워민스터의 해군 항공 개발 센터 존스빌에서 진행되었다. 랭글리 풍동과 홀로먼 공군 기지의 로켓 썰매 트랙은 공기역학 연구에 사용되었다.
해군과 공군 항공기는 우주선의 착륙 시스템 개발에 사용되었으며, 해군 함선, 해군 및 해병대 헬리콥터는 회수 작업에 사용되었다.
시설 | 위치 | 역할 |
---|---|---|
대서양 미사일 기지 | 플로리다주 케이프 커내버럴 | 유인 로켓 발사, 머큐리 제어 센터 |
고다드 우주 비행 센터 | 메릴랜드주 | 통신 네트워크 컴퓨팅 센터 |
월롭스 섬 | 버지니아주 | 리틀 조 로켓 발사 |
랭글리 연구 센터 | 버지니아주 햄프턴 | 우주 비행사 훈련, 풍동 실험 |
루이스 비행 추진 연구소 (글렌 연구 센터) |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 우주 비행사 훈련 |
해군 항공 개발 센터 존스빌 | 펜실베이니아주 워민스터 | 우주 비행사 훈련 |
홀로먼 공군 기지 | 뉴멕시코주 알라모고도 | 로켓 썰매 트랙, 공기역학 연구 |
4. 우주선 및 발사체
머큐리 계획에는 머큐리-레드스톤 발사체, 아틀라스 LV-3B, 리틀 조 로켓이 사용되었다.
머큐리-레드스톤 발사체는 탄도 비행을 위한 약 25.30m (캡슐 및 탈출 시스템 포함) 높이의 단일 로켓 발사체였다.[1] 알코올과 액체 산소를 연소시켜 약 75000lbf의 추력을 생성하는 액체 연료 엔진을 사용했지만, 궤도 임무에는 충분하지 않았다.[1] 이 로켓은 독일의 V-2을 개량하여[2] 1950년대 초 미국 육군을 위해 개발되었다. 머큐리 계획을 위해 탄두를 제거하고 우주선을 지지하기 위한 칼라와 발사 중 진동을 감쇠시키는 재료를 추가하여 개조되었다.[3] 로켓 모터는 노스 아메리칸 항공에서 생산되었으며, 비행 중 핀을 사용하여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4]
아틀라스 LV-3B는 궤도 비행에 사용되었다.
리틀 조 발사체는 발사 탈출 시스템의 무인 테스트에 사용되었다.[5] 최대 동압(max q)에서 시스템을 테스트하고,[6] 우주 비행사가 가장 심한 진동을 겪는 지점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7] 고체 연료 추진제를 사용했으며, 1958년 미국 항공 자문 위원회(NACA)에서 준궤도 유인 비행을 위해 설계되었지만, 머큐리 계획에서 아틀라스-D 발사를 시뮬레이션하도록 재설계되었다.[8] 노스아메리칸 항공에서 생산되었다.[9]
머큐리-레드스톤과 아틀라스 로켓 모두 자동 중지 장치가 탑재되어, 이상 발생 시 자동으로 비상 탈출용 로켓을 점화했다.[11]
머큐리 우주선 제작은 1959년 1월 맥도넬 항공기 공사가 선정되었다.[12]
4. 1. 머큐리 우주선
머큐리 우주선의 주요 설계자는 NACA 시절부터 유인 우주 비행 연구를 시작한 맥심 파제였다.[1] 우주선은 원뿔 모양이었고, 좁은 끝 부분에 목이 있었다.[2] 길이는 약 3.29m, 폭은 약 1.83m였으며, 발사 탈출 시스템을 추가하면 전체 길이는 약 7.89m였다.[2] 약 2831.68L3의 거주 공간을 가진 캡슐은 단일 승무원 한 명에게 겨우 충분한 크기였다.[3] 내부에는 55개의 전기 스위치, 30개의 퓨즈, 35개의 기계식 레버 등 총 120개의 제어 장치가 있었다.[4] 가장 무거운 우주선인 머큐리-아틀라스 9호의 완전 적재 중량은 약 1360.78kg였다.[5] 외부 덮개는 고온을 견딜 수 있는 니켈 합금인 레네 41로 만들어졌다.[6]
우주선 바닥 부분에는 볼록한 형태의 내열 보호판(아래 그림의 '''2''' 참조)이 설치되어 있었고,[8] 그 내부는 유리 섬유로 여러 겹 덮인 알루미늄 벌집 구조였다.[9] 열 보호판에는 귀환 시 우주선의 속도를 줄이기 위한 3기의 역추진 로켓('''1''')이 스트랩으로 고정되어 있었다.[10] 역추진 로켓 사이에는 발사 최종 단계에서 기체를 로켓에서 분리하여 궤도에 진입시키기 위한 소형 로켓이 있었다.[11] 스트랩은 역추진 로켓 사용 후에 절단되었고, 불필요해진 로켓은 기체에서 분리되었다.[12] 열 보호판 바로 위에는 가압된 선실('''3''')이 있었고,[13] 선내에서는 비행사가 몸에 맞춘 좌석에 안전벨트로 묶였다. 비행사의 눈 앞에는 계기판이, 등 뒤에는 열 보호판이 있었고,[14] 좌석 바로 아래에는 환경 제어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장치는 산소 공급과 선내 온도 조절을 했으며,[15] 이산화 탄소, 수증기, 냄새를 제거하고, 궤도상에서 소변을 수집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16] 선단부에는 회수 장치가 수납된 구획('''4''')이 있었으며,[17] 내부에는 감속용 드로그 슈트 1개와 메인 낙하산 2개(주 낙하산과 예비 낙하산)가 격납되어 있었다.[18] 열 보호판과 선내 바닥 격벽 사이에는 에어백이 수납되어, 착수 직전에 전개하여 충격을 완화했다.[19] 회수 장치보다 더 앞쪽에는 안테나 구획('''5''')이 있었고,[20] 통신용과 우주선 추적용 2기의 안테나가 격납되어 있었다.[21] 또한, 귀환 시 열 보호판이 제대로 진행 방향을 향하도록 자세를 안정시키는 플랩도 설치되어 있었다.[22] 우주선 전방에 부착된 비상 탈출용 로켓('''6''')에는 3기의 고체 연료 로켓이 장착되어 있었다.[23] 발사가 실패했을 경우 비상 탈출용 로켓이 짧은 시간 동안 엔진을 분사하여 우주선을 신속하고 확실하게 발사 로켓에서 멀리 떨어뜨리고, 기체가 해면에 접근하면 낙하산이 전개되어 착수했다.[23]
NASA는 1958년부터 1959년에 걸쳐 세 차례에 걸쳐 머큐리 우주선의 설계를 변경했다.[24] 1958년 11월, NASA는 제출된 설계안 중 "C안"을 채택했지만,[25] 1959년 7월의 시험 비행이 실패한 후 최종 형태인 "D안"이 채택되었다.[26] 내열 보호판의 형태는 1950년대 탄도 미사일 실험을 통해 개발이 진행되었으며, 선단을 둔각으로 하면 발생한 충격파가 우주선 주변의 열을 대부분 분산시키는 것으로 밝혀졌다. 열 보호 대책으로는 히트 싱크 또는 융해제를 보호판에 첨가하는 것이 검토되었는데, 히트 싱크는 보호판 표면에 작은 구멍을 뚫어 공기를 분사하여 열을 발산시키는 방식이고, 융해제는 보호판 표면에 열로 녹는 물질을 발라 증발시켜 열을 빼앗는 방식이다. 무인 시험 결과, 융해제가 채택되었다.
우주선은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맥도넬 에어크래프트사 공장 내의 클린룸에서 제조되었고, 같은 곳의 진공실에서 시험되었다. 600개 가까운 하청 기업 중에는 우주선의 환경 제어 시스템을 제조한 개럿 에어리서치(Garrett AiResearch)사 등이 있었다. 최종 품질 검사 및 준비는 케이프 커내버럴의 S 격납고에서 이루어졌다. NASA는 20기의 우주선을 발주했고, 각각 1번부터 20번까지의 번호가 부여되었지만, 10, 12, 15, 17, 19번 기체는 비행하지 못했다. 3번 기와 4번 기는 무인 비행 시험 중에 파괴되었고, 11번 기는 대서양 바닥에 침몰했다가 38년 후에 회수되었다.
4. 2. 발사체
머큐리 계획에서는 다음 2종류의 발사 로켓이 사용되었다.[1]구분 | 발사체 | 설명 |
---|---|---|
탄도 비행 | 머큐리-레드스톤 발사체 | 약 25.30m (캡슐 및 탈출 시스템 포함)의 단일 로켓 발사체이다.[1] 알코올과 액체 산소를 연소시켜 약 75000lbf의 추력을 생성하는 액체 연료 엔진을 사용했지만, 궤도 임무에는 충분하지 않았다.[1] 이 로켓은 독일의 V-2을 개량하여[1] 1950년대 초 미국 육군을 위해 개발되었다.[1] 머큐리 계획을 위해 탄두를 제거하고 우주선을 지지하기 위한 칼라와 발사 중 진동을 감쇠시키는 재료를 추가하여 개조되었다.[1] 로켓 모터는 노스 아메리칸 항공에서 생산되었으며, 비행 중 핀을 사용하여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1] 핀은 주변 공기를 조절하거나 내부 부품으로 추력을 조절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했다(또는 둘 다 동시에).[1] |
궤도 비행 | 아틀라스 LV-3B (아틀라스 D) | 1950년대 중반에 컨베어사(Convair)가 공군을 위해 개발한[1] 것으로, 산화제에는 액체 산소(LOX)를, 연료에는 케로신을 사용했다.[1] 로켓 자체의 전체 높이는 20미터이지만, 우주선과 비상 탈출용 로켓을 더하면 (로켓과 우주선의 접합부 포함) 29미터가 되었다.[1] 1단은 2기의 엔진으로 이루어진 스커트부로, 로켓 본체에서 연료와 액체 산소를 공급받아[1] 발사 시에는 중앙의 본체 로켓과 함께 연소 가스를 분사하여[1] 우주선을 궤도에 진입시키기에 충분한 추력을 발생시켰다.[1] 1단 분리 후에는 중앙의 본체 로켓이 연소를 계속했다. 본체 로켓에는 스러스터가 장착되어 자이로스코프에 따라 작동했다.[1] 이 2기의 소형 로켓은 본체 측면에 설치되어, 보다 정확하게 기체를 유도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1] 외피는 매우 얇은 스테인리스강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기체가 찌그러지지 않도록 항상 연료 또는 헬륨 가스로 내부에서 압력을 가해줄 필요가 있었다.[1] 이는 연료 무게의 2퍼센트까지 기체의 무게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1] 또한 아틀라스 D는 원래 핵탄두를 탑재하기 위해 설계되었기 때문에, 그보다 무게가 있는 우주선을 싣기 위해서는 기체를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1] |
머큐리-레드스톤과 아틀라스 로켓 모두 이상을 감지하는 자동 중지 장치가 탑재되어, 뭔가 이상이 발생한 경우에는 자동으로 비상 탈출용 로켓을 점화하도록 되어 있었다.[1]
이 외에 높이 17m의 리틀 조라고 불리는 소형 로켓도 사용되었다. 이것은 발사 탈출 시스템의 무인 테스트용이며, 분리용 로켓 엔진을 가진 모듈 (소위 어보트 타워)이 부착된 우주선이 그 상부에 설치되었다.[1] 그 주요 목적은, 동압이 최대가 되어 우주선을 로켓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가장 어려워지는 최대 동압점 (맥스 Q)이라 하더라도 시스템을 기능하게 하는 것이었다.[1] 리틀 조는 고체 연료 로켓을 사용했으며, 1958년에 NACA에 의해 유인 탄도 비행을 목적으로 설계되었지만, 머큐리 계획에서 아틀라스 D의 발사를 시뮬레이션하는 것을 목적으로 재설계되었다.[1] 기체의 제작은 노스 아메리칸 항공이 했다.[1]
5. 우주 비행사
1959년 NASA는 머큐리 계획에 참가할 우주비행사를 모집했다. 선발 기준은 테스트 파일럿 출신이어야 하고, 나이는 40세, 체중은 82kg, 키는 178cm를 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주 비행사는 고열 차폐막을 등지고 앉은 자세를 취했는데, 이는 인간이 발사 및 재진입 시 높은 G-포스를 견디는 데 가장 적합한 자세였기 때문이다. 각 우주 비행사의 우주복을 입은 신체에 맞춰 맞춤 제작된 유리 섬유 좌석은 최대한의 지지력을 제공했다. 왼손 근처에는 자동 트리거가 고장 났을 경우 발사 전이나 발사 중에 필요한 경우 발사 탈출 시스템을 활성화하기 위한 수동 비상 탈출 손잡이가 있었다.[1]
기내 환경 제어 시스템을 보완하기 위해, 우주비행사는 자체 산소 공급 장치가 있는 압력복을 착용했는데, 이 압력복은 그를 시원하게 해 주었다.[1] 해수면에서 공기(질소/산소)와 동일한 조성을 가진 것 대신 5.5psi (약 7559.04m 고도와 동일)의 저압 순수 산소의 기내 대기가 선택되었다.[1] 이는 제어하기가 더 쉬웠고, 감압병("잠수병")의 위험을 피했으며, 우주선 무게를 절약했다. 화재(머큐리 계획 기간 동안 발생하지 않음)는 기내의 산소를 비움으로써 진압해야 했다.[1] 이러한 경우 또는 어떤 이유로든 기내 압력이 고장 났을 경우, 우주 비행사는 생존을 위해 자신의 우주복에 의존하여 지구로 비상 귀환할 수 있었다.[1] 우주 비행사들은 일반적으로 바이저를 올린 채 비행했는데, 이는 우주복이 팽창되지 않았음을 의미했다.[1] 바이저를 내리고 우주복을 팽창시키면 우주 비행사는 중요 버튼과 손잡이가 배치된 측면 및 하단 패널에만 도달할 수 있었다.[1]
우주 비행사는 가슴에 전극을 착용하여 심장 박동을 기록하고, 혈압을 측정할 수 있는 커프, 체온을 기록하기 위한 직장 체온계를 착용했다(마지막 비행에서는 구강 체온계로 대체됨).[1] 이러한 데이터는 비행 중에 지상으로 전송되었다.[1] 우주 비행사는 일반적으로 물을 마시고 음식 펠릿을 먹었다.[1]
궤도에 진입하면, 우주선은 요, 피치, 롤로 회전할 수 있었다. 즉, 종축을 따라(롤), 우주 비행사의 시점에서 좌우로(요), 위아래로(피치) 회전할 수 있었다.[1] 움직임은 로켓 엔진에 의해 생성되었으며, 이 엔진은 과산화수소를 연료로 사용했다.[1] 방향을 잡기 위해, 조종사는 앞의 창을 통해 보거나 360° 회전할 수 있는 카메라가 장착된 잠망경에 연결된 화면을 볼 수 있었다.[1]
머큐리 우주 비행사들은 우주선의 개발에 참여했으며, 수동 제어 및 창이 설계의 요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 그 결과, 우주선 이동 및 기타 기능은 지상 기지를 통과할 때 지상에서 원격으로, 기내 계측기에 의해 자동으로, 또는 다른 두 가지 방법을 대체하거나 재정의할 수 있는 우주 비행사에 의해 수동으로 제어할 수 있었다. 경험은 수동 제어에 대한 우주 비행사의 주장을 입증했다. 그것 없이는 마지막 비행 동안 고든 쿠퍼의 수동 재진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1]
머큐리 계획 이전에는 우주비행사 선발을 위한 규정이 없었으므로, NASA는 선발 과정과 초기 우주비행사 후보 선정 모두에서 광범위한 선례를 세우게 되었다. 처음에는 암벽 등반가나 곡예사와 같은 스릴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지원을 허용하려 했지만, NASA 관계자들에 의해 기각되었다. 1958년 말, NASA 관계자들은 테스트 파일럿을 선발 풀의 핵심으로 삼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로 결정했다.[11]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주장에 따라, 후보군은 현역 군인 테스트 파일럿으로 더욱 좁혀졌다. 당시에는 여성이 군에서 비행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므로 테스트 파일럿 자격을 얻을 수 없었다.
후보자는 25세에서 40세 사이여야 하며, 키는 180cm를 넘지 않아야 하고, STEM 분야의 대학 학위를 소지해야 한다는 조건이 추가되었다. 대학 학위 요구 사항으로 인해, 음속을 돌파한 최초의 인물인 척 예거는 제외되었다.[12] 존 글렌 역시 대학 학위가 없었지만, 영향력 있는 친구들을 이용하여 선발 위원회가 그를 받아들이도록 했다.
원래 508명 중 110명의 후보가 면접을 위해 선정되었으며, 면접을 통해 32명이 추가적인 신체 및 정신 검사를 위해 선정되었다. 특별 챔버에서 그들은 혼란스러운 조건에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지 테스트를 받았다. 후보들은 자신에 대해 500개 이상의 질문에 답해야 했고, 다양한 이미지에서 무엇을 보는지 설명해야 했다. 이러한 테스트 후에는 6명의 우주비행사로 후보군을 좁힐 예정이었지만, 결국 7명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우주비행사들은 선발 과정에서 사용된 것과 동일한 몇 가지 훈련을 포함하는 훈련 프로그램을 거쳤다. 그들은 해군 항공 개발 센터에서 원심 분리기를 사용하여 발사 및 재진입의 중력 가속도 프로파일을 시뮬레이션했다. 무중력 훈련은 항공기에서 진행되었으며, 처음에는 2인승 전투기의 뒷좌석에서, 나중에는 개조되고 패딩 처리된 화물기 내부에서 진행되었다. 그들은 루이스 비행 추진 연구소의 MASTIF(Multi-Axis Spin-Test Inertia Facility)라는 기계에서 우주선의 자세 제어 핸들을 사용하여 회전하는 우주선을 제어하는 연습을 했다.[14][15] 궤도에서 올바른 자세를 찾는 추가 조치로, 천체투영관과 시뮬레이터에서 별과 지구 인식 훈련이 진행되었다. 통신 및 비행 절차는 비행 시뮬레이터에서 연습되었으며, 처음에는 단 한 명의 보조자와 함께, 나중에는 미션 관제 센터와 함께 연습했다. 회수 훈련은 랭글리 공군 기지의 수영장에서, 나중에는 잠수부와 헬리콥터 승무원과 함께 바다에서 진행되었다.
5. 1. 머큐리 세븐
1959년 NASA는 머큐리 계획에 참가할 7명의 우주비행사를 모집했고 도널드 슬레이튼, 앨런 셰퍼드, 월터 시라, 버질 그리섬, 존 글렌, 고든 쿠퍼, 스콧 카펜터가 선발되었다. 이들을 머큐리 세븐이라고 불렀다.
선발 기준은 테스트 파일럿(비행기를 개발했을 때 처음 시험하는 베테랑 비행사) 출신이어야 하고, 나이는 40세, 체중은 82kg, 키는 178cm를 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1959년 4월 9일, NASA는 머큐리 세븐으로 알려진 다음의 7명의 우주 비행사를 발표했다.[1]
이름 | 소속 | 생몰년 |
---|---|---|
스콧 카펜터 | 해군 | 1925년~2013년 |
고든 쿠퍼 | 공군 | 1927년~2004년 |
존 허셜 글렌 | 해병대 | 1921년~2016년 |
거스 그리섬 | 공군 | 1926년~1967년 |
월터 시러 | 해군 | 1923년~2007년 |
앨런 셰퍼드 | 해군 | 1923년~1998년 |
도널드 슬레이턴 | 공군 | 1924년~1993년 |
셰퍼드는 1961년 5월에 탄도 비행에 성공하여, 우주에 간 최초의 미국인이 되었다.[1] 그는 아폴로 14호에서도 비행하여, 머큐리 세븐 중에서 유일하게 달 표면에 착륙했다.[1] 그리섬은 미국인으로서 두 번째로 우주에 갔으며, 제미니 계획 및 아폴로 계획에도 참가했지만, 1967년 1월 아폴로 1호의 사고로 사망했다.[1] 글렌은 1962년 2월에 지구 궤도에 도달한 최초의 미국인이 되었고, NASA를 은퇴하여 정치가가 되었지만, 1998년에 우주왕복선STS-95로 비행사로 복귀했다.[1] 슬레이턴은 건강상의 이유로 머큐리 계획에 참여하지 못하고, 1962년부터 NASA에 직원으로 남았지만, 1975년에 아폴로-소유스 테스트 계획에서 비행했다.[1] 쿠퍼는 머큐리 마지막 비행에서 가장 오랫동안 우주에 체류했으며, 제미니 계획에서도 비행했다.[1] 카펜터는 머큐리 계획이 유일한 우주 비행이었다. 시러는 머큐리 계획에서 세 번째 지구 궤도 비행에 참여했으며, 제미니 계획에도 참가했다. 3년 후 아폴로 7호에서 선장을 맡아, 머큐리, 제미니, 아폴로 3개의 계획에서 우주에 간 유일한 우주 비행사가 되었다.
비행사들의 임무에는 홍보 활동도 포함되어, 언론 인터뷰, 계획 관련 시설 방문 및 직원들과의 대화 등을 했다.[1] 비행사들은 이동을 위해 제트 전투기 사용을 요구했다.[1] 언론에서는 존 글렌이 가장 호평을 받았으며, 머큐리 세븐의 대표처럼 여겨졌다.[1] 비행사들은 『라이프』지에 수기를 기고했고, 라이프 지는 그들을 애국적이고 신앙심이 깊으며 가족을 생각하는 남성으로 묘사했다.[1]
5. 2. 선발 및 훈련
1959년 NASA는 머큐리 계획에 참가할 우주비행사 7명을 모집했는데, 도널드 슬레이튼, 앨런 셰퍼드, 월터 시라, 버질 그리섬, 존 글렌, 고든 쿠퍼, 스콧 카펜터가 선발되었다. 선발 기준은 테스트 파일럿 출신이어야 하고, 나이는 40세, 체중은 82kg, 키는 178cm를 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NASA는 1959년 4월 9일 머큐리 세븐으로 알려진 7명의 우주 비행사를 발표했다.[1]
이름 | 발사 | 계급 | 부대 | 출생 | 사망 |
---|---|---|---|---|---|
M. 스콧 카펜터 | 1962년 5월 24일 | 중위 | 미 해군(USN) | 1925년 | 2013년 |
L. 고든 쿠퍼 | 1963년 5월 15일 | 대위 | 미 공군(USAF) | 1927년 | 2004년 |
존 H. 글렌 주니어 | 1962년 2월 20일 | 소령 | 미 해병대(USMC) | 1921년 | 2016년 |
버질 I. 그리섬 | 1961년 7월 21일 | 대위 | 미 공군 | 1926년 | 1967년 |
월터 M. 시라 주니어 | 1962년 10월 3일 | 중령 | 미 해군 | 1923년 | 2007년 |
앨런 B. 셰퍼드 주니어 | 1961년 5월 5일 | 중령 | 미 해군 | 1923년 | 1998년 |
도널드 K. 슬레이턴 | 소령 | 미 공군 | 1924년 | 1993년 |
- 앨런 셰퍼드는 1961년 5월 5일 준궤도 비행에 성공하여 미국 최초의 우주인이 되었다.[5] 그는 아폴로 14호에서 달을 걸은 유일한 머큐리 우주 비행사가 되었다.[6]
- 거스 그리섬은 1961년 7월 21일 머큐리-레드스톤 4호에서 두 번째 미국인 우주인이 되었다. 그는 제미니와 아폴로 계획에 참여했지만 1967년 1월 아폴로 1호 발사 전 테스트 중 사망했다.[7]
- 존 글렌은 1962년 2월 20일 머큐리-아틀라스 6호에서 지구 궤도를 돈 최초의 미국인이 되었다. 그는 1964년 NASA를 그만두고, 나중에 미국 상원에 선출되어 1974년부터 1999년까지 재임했다. 재임 기간 중 그는 1998년 STS-95호에 탑승하여 우주로 돌아갔다.[8]
- 스콧 카펜터는 1962년 5월 24일 머큐리-아틀라스 7호에 탑승했다. 그 후 그는 해군의 "바다 속의 인간"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우주 비행사이자 수중 탐험가인 유일한 미국인이 되었다.[9]
- 월리 시라는 1962년 10월 3일 ''시그마 7''에 탑승하여 머큐리-아틀라스 8호를 비행했다. 1965년 12월 시라는 제미니 6A호를 비행하여 최초의 우주 랑데부를 달성했다. 3년 후 그는 아폴로 7호를 지휘하여 머큐리, 제미니, 아폴로 프로그램을 모두 비행한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 고든 쿠퍼는 1963년 5월 15일 머큐리-아틀라스 9호로 프로젝트 머큐리의 마지막 비행을 했다. 그는 나중에 제미니 계획에 참여하여 제미니 5호에서 다시 한 번 지구력 기록을 깼다.[10]
- 데케 슬레이턴은 1962년 심장 질환으로 인해 비행이 중단되었지만 NASA에 남아 우주 비행사 사무소의 수석 관리자로 임명되었다. 1972년 3월 13일 슬레이턴은 비행 상태로 복귀했고 다음 해에 아폴로-소유스 시험 계획에 배정되어 1975년에 성공적으로 비행했다.
우주 비행사들의 임무 중 하나는 홍보였는데, 그들은 언론과 인터뷰를 하고 프로젝트 머큐리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 제조 시설을 방문했다. 언론은 특히 7명 중 최고의 연설가로 여겨졌던 존 글렌을 좋아했다. 그들은 그들을 '애국적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장(家長)들'로 묘사한 ''라이프'' 잡지에 개인적인 이야기를 팔았다.
머큐리 계획 이전에는 우주비행사 선발을 위한 규정이 없었으므로, NASA는 선발 과정과 초기 우주비행사 후보 선정 모두에서 광범위한 선례를 세우게 되었다. 처음에는 암벽 등반가나 곡예사와 같은 스릴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지원을 허용하려 했지만, NASA 관계자들에 의해 기각되었다. 1958년 말, NASA 관계자들은 테스트 파일럿을 선발 풀의 핵심으로 삼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로 결정했다.[11]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주장에 따라, 후보군은 현역 군인 테스트 파일럿으로 더욱 좁혀졌다. 이 항공 조종사들은 최첨단 항공기를 조종하는 데 능숙했기 때문에, 새로운 우주비행사 직책에 가장 적합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11] 당시에는 여성이 군에서 비행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므로 테스트 파일럿 자격을 얻을 수 없었다.
후보자는 25세에서 40세 사이여야 하며, 키는 180cm를 넘지 않아야 하고, STEM 분야의 대학 학위를 소지해야 한다는 조건이 추가되었다. 대학 학위 요구 사항으로 인해, 척 예거는 제외되었는데, 그는 음속을 돌파한 최초의 인물이었다.[12] 존 글렌 역시 대학 학위가 없었지만, 영향력 있는 친구들을 이용하여 선발 위원회가 그를 받아들이도록 했다.
원래 508명 중 110명의 후보가 면접을 위해 선정되었으며, 면접을 통해 32명이 추가적인 신체 및 정신 검사를 위해 선정되었다. 특별 챔버에서 그들은 혼란스러운 조건에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지 테스트를 받았다. 후보들은 자신에 대해 500개 이상의 질문에 답해야 했고, 다양한 이미지에서 무엇을 보는지 설명해야 했다. 이러한 테스트 후에는 6명의 우주비행사로 후보군을 좁힐 예정이었지만, 결국 7명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우주비행사들은 선발 과정에서 사용된 것과 동일한 몇 가지 훈련을 포함하는 훈련 프로그램을 거쳤다. 그들은 해군 항공 개발 센터에서 원심 분리기를 사용하여 발사 및 재진입의 중력 가속도 프로파일을 시뮬레이션했다. 무중력 훈련은 항공기에서 진행되었으며, 처음에는 2인승 전투기의 뒷좌석에서, 나중에는 개조되고 패딩 처리된 화물기 내부에서 진행되었다. 그들은 루이스 비행 추진 연구소의 MASTIF(Multi-Axis Spin-Test Inertia Facility)라는 기계에서 우주선의 자세 제어 핸들을 사용하여 회전하는 우주선을 제어하는 연습을 했다.[14][15] 궤도에서 올바른 자세를 찾는 추가 조치로, 천체투영관과 시뮬레이터에서 별과 지구 인식 훈련이 진행되었다. 통신 및 비행 절차는 비행 시뮬레이터에서 연습되었으며, 처음에는 단 한 명의 보조자와 함께, 나중에는 미션 관제 센터와 함께 연습했다. 회수 훈련은 랭글리 공군 기지의 수영장에서, 나중에는 잠수부와 헬리콥터 승무원과 함께 바다에서 진행되었다.
6. 비행 계획
머큐리 계획의 비행은 크게 탄도 비행과 궤도 비행 두 가지로 나뉜다.[10]
탄도 비행은 레드스톤 로켓을 사용하여 2분 30초 동안 우주선을 32nmi 고도까지 상승시킨 후, 로켓이 분리되면 포물선 궤도를 그리며 관성 비행을 하는 방식이다.[5][6] 발사 후 자연 낙하하므로 역분사 로켓은 원래 필요하지 않았지만, 성능 검증을 위해 점화되었다. 탄도 비행과 궤도 비행 모두 우주선은 대서양에 착수했다.[7] 탄도 비행은 약 15분 동안 진행되었으며, 고도는 102nmi에서 103nmi, 비행 거리는 262nmi에 도달했다.[8][9]
궤도 비행에서는 아틀라스 로켓 엔진이 발사 4초 전에 점화된다. 충분한 추력이 발생하면 고정 장치가 해제되고 발사된다.(A)[1] 발사 30초 후, 동압이 최대가 되는 지점(Max Q)에서 비행사는 심한 진동을 느낀다.[2] 2분 10초 후, 1단 스커트부가 분리되고(B)[1], 비상 탈출 로켓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므로 분리된다.(C)[3]
이후 로켓은 점차 수평으로 기울어지고, 발사 5분 10초 후, 고도 87nmi에서 우주선이 궤도에 진입한다.(D)[4] 이때 3개의 소형 로켓이 1초간 점화되어 우주선이 로켓과 분리된다.[6] 엔진 정지 직전에는 8G(탄도 비행은 6G)의 가속도가 발생한다.[2][7] 궤도에 진입하면 우주선은 자동으로 180° 회전하여 역분사 로켓을 전방으로 향하게 하고, 기수를 14.5° 아래로 기울인다. 이는 지상과의 통신을 위한 것이다.[8][9]
일단 궤도에 진입하면, 대기권 재진입을 제외하고는 궤도 변경이 불가능하다.[10] 지구 한 바퀴는 보통 88분이 걸린다.[11] 궤도의 가장 낮은 지점인 근지점은 약 87nmi 고도이며, 가장 높은 지점인 원지점은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다.[12]
귀환 시(E)에는 아래쪽 각도가 34°로 증가한다.[8] 역분사 로켓은 10초씩 연소되며, 5초 간격으로 순차 점화된다.(F)[6][13] 재진입 시(G) 비행사는 8G(탄도 비행은 11~12G)의 가속도를 경험하며,[14] 내열 보호판 온도는 3000°F까지 상승한다. 이때 공기 이온화로 인해 2분간 통신 두절(블랙아웃)이 발생한다.[15][16]
재진입 후, 고도 약 6400.80m에서 소형 낙하산(드로그 슈트)이 전개되어 자세를 안정시키고(H)[17], 약 3048.00m에서 주 낙하산이 전개된다.(I) 주 낙하산은 처음에는 작게 열리고 수 초 후 완전히 펼쳐진다.[18] 착수 직전, 내열 보호판 뒤의 에어백이 팽창하여 충격을 완화한다.(J)[18] 착수 후에는 낙하산을 분리하고,[19] 안테나를 펼쳐 전파 비콘을 발신한다.(K) 또한, 녹색 염료를 뿌려 식별을 용이하게 한다.[19]
머큐리 계획의 유인 비행은 모두 성공했지만, 일부 비행은 계획 단계에서 취소되었다.[18] 비행 중 주요 문제는 개인 위생과 비행 후 기립성 저혈압이었다.[18] 유인 임무 번호는 무인 비행 시험 때문에 1번부터 시작하지 않았고,[18] "머큐리-레드스톤"(MR, 준궤도 비행)과 "머큐리-아틀라스"(MA, 궤도 비행)라는 두 가지 번호 체계가 사용되었다. 우주비행사들은 7명의 우주비행사를 기념하여 "7"로 끝나는 우주선 이름을 직접 지었다.[18] 우주선 생산 번호는 임무 순서와 일치하지 않았고, 일부는 예비용으로 보관되거나 시험에 사용되었다.[18] 시간은 UTC 기준이며, 현지 시간보다 5시간 빠르다.
주요 유인 비행:
임무 | 우주선 번호 | 호출 부호 | 조종사 | 발사 | 비행 시간 | 궤도 | 원지점 (km) | 근지점 (km) | 최대 속도 (km/h) | 빗나감 (km) | |
---|---|---|---|---|---|---|---|---|---|---|---|
시간 | 장소 | ||||||||||
MR-3 | 7 | Freedom 7 | 셰퍼드 | 1961년 5월 5일 14:34 | LC-5 | 15분 22초 | 0 | 188 | — | 8,262 | 5.6 |
MR-4 | 11 | Liberty Bell 7 | 그리섬 | 1961년 7월 21일 12:20 | LC-5 | 15분 37초 | 0 | 190 | — | 8,317 | 9.3 |
MA-6 | 13 | Friendship 7 | 글렌 | 1962년 2월 20일 14:47 | LC-14 | 4시간 55분 23초 | 3 | 261 | 161 | 28,234 | 74 |
MA-7 | 18 | Aurora 7 | 카펜터 | 1962년 5월 24일 12:45 | LC-14 | 4시간 56분 5초 | 3 | 269 | 161 | 28,242 | 400 |
MA-8 | 16 | Sigma 7 | 시라 | 1962년 10월 3일 12:15 | LC-14 | 9시간 13분 15초 | 6 | 283 | 161 | 28,257 | 7.4 |
MA-9 | 20 | Faith 7 | 쿠퍼 | 1963년 5월 15일 13:04 | LC-14 | 1일 10시간 19분 49초 | 22 | 267 | 161 | 28,239 | 8.1 |
비고:
- MR-3: 최초의 미국인 우주 비행.[18] USS ''Lake Champlain''에 의해 회수.[18]
- MR-4: 회수 중 우주선 침몰.[18] USS ''Randolph''에 의해 우주비행사 구조.[18]
- MA-6: 최초의 미국 궤도 비행.[18] USS ''Noa''에 의해 회수.[18]
- MA-7: 카펜터가 데이크 슬레이턴 대체.[18] USS ''Farragut''에 의해 회수.[18] 가장 큰 착륙 오차 발생.[18]
- MA-8: 가장 계획에 근접한 비행.[18] USS ''Kearsarge''에 의해 회수.[18]
- MA-9: 최초의 미국인 1일 이상 우주 비행, 마지막 미국 단독 임무.[18] USS ''Kearsarge''에 의해 회수.[18]
6. 1. 탄도 비행
NASA는 미지의 우주 환경에 인간이 도전하기 전에, 무인 로켓 발사와 동물 실험을 통해 안전성을 검증했다. 이 과정에서 두 마리의 원숭이(샘과 미스샘)와 한 마리의 침팬지(햄)가 준궤도 비행에 성공했고, 침팬지(에노스)는 궤도 비행에 성공했다.1961년 5월 5일,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의 레드스톤 로켓에 의해 앨런 셰퍼드 중령의 유인 시험 비행(탄도 비행, 고도 2,000km, 비행 시간 15분)이 성공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이 결과를 바탕으로 아폴로 계획을 결정했다. 한편, 소련에서는 유리 가가린 소령이 4월 12일 인류 최초의 우주 비행에 성공했다. 앨런 셰퍼드에 이어 V. 그리솜이 1961년 7월 21일 탄도 비행을 성공시켰고, 8월 6일 소련의 티토프 소령은 지구를 17바퀴 도는 우주 비행을 완료했다.
머큐리-레드스톤 발사체는 탄도 비행을 위한 단일 로켓 발사체였다(캡슐 및 탈출 시스템 포함).[1] 이 로켓은 알코올과 액체 산소를 연소시켜 약 75lbf의 추력을 생성하는 액체 연료 엔진을 사용했지만, 궤도 임무에는 충분하지 않았다.[1] 이 로켓은 독일 V-2의 후손이며,[2] 1950년대 초 미국 육군을 위해 개발되었다. 머큐리 계획을 위해 탄두를 제거하고 우주선을 지지하기 위한 칼라와 발사 중 진동을 감쇠시키는 재료를 추가하여 개조되었다.[3] 로켓 모터는 노스 아메리칸 항공에서 생산되었으며, 비행 중 핀을 사용하여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핀은 주변 공기를 조절하거나 내부 부품으로 추력을 조절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했다(또는 둘 다 동시에).[2] 아틀라스-D와 레드스톤 발사체 모두 문제가 발생할 경우 발사 탈출 시스템을 발사하여 발사를 중단할 수 있는 자동 중단 감지 시스템을 포함했다.[4]
레드스톤 로켓은 2분 30초 동안 캡슐을 32nmi 고도로 올리는 데 사용되었으며, 캡슐은 부스터 분리 후 탄도 곡선을 그리며 계속 상승했다.[5][6] 발사 탈출 시스템은 동시에 투기되었다. 곡선 정상에서 우주선의 감속 로켓이 시험 목적으로 발사되었으며, 궤도 속도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재진입에는 필요하지 않았다. 우주선은 대서양에 착륙했다.[7] 준궤도 비행은 약 15분 소요되었고, 원지점 고도는 에서 였으며, 사정거리는 262nmi였다.[8][9] 부스터-우주선 분리 시점부터 공기가 우주선의 속도를 늦추기 시작하는 재진입 시점까지, 조종사는 이미지에 표시된 대로 무중력을 경험하게 된다. 회수 절차는 궤도 비행과 동일하다.
시간표 (분:초) | |
---|---|
0:00 | 발사 |
2:22 | 발사체 차단 및 타워 분리 |
2:32 | 우주선 분리 |
2:37 | 방향 전환 |
5:14 | 역추진 |
6:14 | 감속 팩 투기 |
7:48 | 재진입 |
9:38 | 드로구 낙하산 전개 |
10:15 | 주 낙하산 전개 |
15:22 | 착륙 |
머큐리 계획에는 탄도 비행, 궤도(지구 궤도) 비행의 두 종류의 비행 계획이 있었다.[10] 탄도 비행에는 레드스톤을 사용, 2분 30초의 연소로 우주선을 고도 32nmi까지 상승시키고, 로켓 분리 후 포물선을 그리며 관성으로 비행했다.[5][6] 발사 후 자연스럽게 낙하하기 때문에 역분사 로켓은 원래 필요하지 않았지만, 성능을 검증하기 위해 점화되었다. 우주선은 탄도 비행, 궤도 비행 모두 대서양으로 귀환했다.[7] 착수 후에는 잠수사가 기체의 자세를 안정시키기 위한 튜브를 부착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탄도 비행에서는 준비가 되지 않았다.[7] 탄도 비행에서는 15분간 비행하여 고도 에서 , 사정거리는 262nmi에 도달했다.[8][9]
6. 2. 궤도 비행
NASA는 인간을 우주로 보내기 전에 무인 로켓 발사와 동물 실험을 통해 안전성을 검증했다. 이 과정에서 샘과 미스샘이라는 두 마리의 원숭이와 햄이라는 침팬지가 준궤도 비행에 성공했고, 에노스라는 침팬지가 궤도 비행에 성공했다.1961년 5월 5일,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의 레드스톤 로켓을 이용한 앨런 셰퍼드 중령의 유인 시험 비행(탄도 비행)이 성공했다. 이 성공으로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아폴로 계획을 결정하게 되었다. 같은 해 4월 12일, 소련의 유리 가가린 소령이 인류 최초로 우주 비행에 성공했다. 1961년 7월 21일, V. 그리솜이 탄도 비행을 성공한 후, 8월 6일 소련의 티토프 소령이 지구를 17바퀴 도는 우주 비행을 마쳤다.
1963년 5월, 머큐리 계획은 종료되었다.
궤도 비행에서 아틀라스 로켓 엔진은 발사 4초 전에 점화된다. 로켓은 고정 장치로 고정되어 있으며, 충분한 추력이 발생하면 후크가 풀리고 발사대를 떠난다 ('''A''')[1]. 30초 후 동압이 최대가 되는 맥스 Q에 도달하며, 이때 비행사는 심한 진동에 노출된다[2]. 2분 10초 후, 제1단 스커트부가 분리된다 ('''B''')[1]. 이 시점에서 비상 탈출용 로켓은 필요 없으므로, 분리용 로켓에 점화하여 투기된다 ('''C''')[3].
로켓은 그 후 점차 진로를 수평으로 기울여, 발사 5분 10초 후, 고도 87해리 (161킬로미터)에서 우주선이 궤도에 진입한다 ('''D''')[4]. 세계 여러 국가에서 인공위성은 지구의 자전을 이용하기 위해 동쪽으로 발사되는 것이 일반적이다[1][5]. 여기서 3기의 분리용 소형 로켓이 1초간 점화되어, 우주선은 로켓에서 분리된다[6]. 엔진을 정지하기 직전에는 가속도가 8G에 달한다 (탄도 비행에서는 6G)[2][7]. 궤도에 진입하면 우주선은 자동으로 180° 방향을 바꾸고, 역분사용 로켓을 전방으로 향하게 하며 기수를 14.5° 하방으로 기울인 자세가 된다. 기수를 아래로 향하게 하는 것은, 지상과의 통신에 필요하기 때문이다[8][9]. 일단 궤도에 진입하면, 우주선은 귀환을 위해 대기권 재진입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궤도를 변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10].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데는 보통 88분이 소요된다[11]. 궤도에 진입하는 것은 근지점이라고 불리는 궤도가 가장 낮아지는 지점으로, 고도는 약 87해리 (161 km)이다. 반대로 가장 높아지는 지점은 원지점이라고 불리며,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다[12]. 귀환 시 ('''E''')에는 아래쪽 각도가 34°까지 증가한다[8]. 역분사 로켓의 연소 시간은 1기가 10초이며, 하나가 점화된 후 각각 5초 간격으로 차례로 분사된다 ('''F''')[6][13]. 재진입 동안 ('''G'''), 비행사에게는 8G (탄도 비행에서는 11~12G)의 가속도가 가해진다[14]. 내열 보호판 주변의 온도는 3000°F에 달하며, 이때 우주선 주변의 공기가 고온으로 인해 이온화되므로, 블랙아웃이라고 불리는 통신이 두절되는 시간대가 2분 정도 발생한다[15][16]. 재진입 후, 고도 약 6400.80m에서 자세를 안정시키기 위한 드로그 슈트라고 불리는 소형 낙하산이 전개되고 ('''H''')[17], 그 후 고도 약 3048.00m에서 메인 낙하산이 전개된다 ('''I''')[17]. 로프에 걸리는 장력을 줄이기 위해 처음에는 작게 열리고, 수 초 후에 완전히 열린다[18]. 착수 직전,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내열 보호판 뒤에 있는 에어백이 전개된다 ('''J''')[18]. 착수하면 낙하산을 분리하고[19], 안테나가 펴지고 함선이나 헬리콥터가 추적할 수 있도록 전파 비콘이 발신된다 ('''K''') [19]. 또한 하늘에서 식별하기 쉽도록, 녹색 염료가 우주선 주변에 흘러나온다[19].
6. 3. 주요 비행
머큐리 계획의 유인 비행은 모두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계획 도중 일부 비행은 취소되었다.[18] 주요한 의학적 문제는 간단한 개인 위생과 비행 후 기립성 저혈압 증상이었다.[18] 발사체는 무인 비행을 통해 시험되었기 때문에 유인 임무의 번호는 1번부터 시작하지 않았다.[18] 또한 "머큐리-레드스톤"(준궤도 비행)을 의미하는 MR과 "머큐리-아틀라스"(궤도 비행)를 의미하는 MA, 두 개의 별도 번호 체계가 있었다. 우주 비행사들이 파일럿 전통에 따라 각자 우주선에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은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7명의 우주 비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7"로 끝나는 이름을 선택했다.[18] 우주선 생산 번호는 임무 순서와 일치하지 않으며, 일부 캡슐은 예비용으로 보관되거나 테스트에 사용되었다.[18] 시간은 협정 세계시(UTC)를 기준으로 하며, 현지 시간에서 5시간을 더한다.임무 | 우주선 번호 | 호출 부호 | 조종사 | 발사 | 비행 시간 | 궤도 | 원지점 (km) | 근지점 (km) | 최대 속도 (km/h) | 빗나감 (km) | |
---|---|---|---|---|---|---|---|---|---|---|---|
시간 | 장소 | ||||||||||
MR-3 | 7 | Freedom 7 | 셰퍼드 | 1961년 5월 5일 14:34 | LC-5 | 15분 22초 | 0 | 188 | — | 8,262 | 5.6 |
MR-4 | 11 | Liberty Bell 7 | 그리섬 | 1961년 7월 21일 12:20 | LC-5 | 15분 37초 | 0 | 190 | — | 8,317 | 9.3 |
MA-6 | 13 | Friendship 7 | 글렌 | 1962년 2월 20일 14:47 | LC-14 | 4시간 55분 23초 | 3 | 261 | 161 | 28,234 | 74 |
MA-7 | 18 | Aurora 7 | 카펜터 | 1962년 5월 24일 12:45 | LC-14 | 4시간 56분 5초 | 3 | 269 | 161 | 28,242 | 400 |
MA-8 | 16 | Sigma 7 | 시라 | 1962년 10월 3일 12:15 | LC-14 | 9시간 13분 15초 | 6 | 283 | 161 | 28,257 | 7.4 |
MA-9 | 20 | Faith 7 | 쿠퍼 | 1963년 5월 15일 13:04 | LC-14 | 1일 10시간 19분 49초 | 22 | 267 | 161 | 28,239 | 8.1 |
비고 | |
---|---|
머큐리-레드스톤 3 | 최초의 미국인 우주 비행.[18] 항공모함 USS Lake Champlain에 의해 회수되었다.[18] |
머큐리-레드스톤 4 | 해치가 예상치 않게 날아가면서 회수 과정에서 우주선이 침몰했다.[18] 우주 비행사는 항공모함 USS Randolph에 의해 회수되었다.[18] |
머큐리-아틀라스 6 | 최초의 미국 궤도 비행.[18] 재진입 중 반사 팩을 유지했다.[18] 구축함 USS Noa에 의해 회수되었다.[18] |
머큐리-아틀라스 7 | 카펜터는 데이크 슬레이턴을 대신했다.[18] 구축함 USS Farragut에 의해 회수되었다.[18] 가장 큰 빗나감.[18] |
머큐리-아틀라스 8 | 계획에 가장 가까운 비행.[18] 기동 테스트를 수행했다.[18] 항공모함 USS Kearsarge에 의해 회수되었다.[18] |
머큐리-아틀라스 9 | 최초의 미국인 1일 이상 우주 비행.[18] 마지막 미국 단독 임무.[18] USS Kearsarge에 의해 회수되었다.[18] |
회수 변동 | MA6) 우주선과 우주 비행사를 직접 탑승시켰고, MA8) 우주선과 우주 비행사를 보트로 끌어다 배에 탑승시켰으며, MA9) 우주 비행사를 태운 우주선을 배로 비행시켰다.[18] |
6. 4. 취소된 계획
7. 지상 관제
머큐리 계획 지원 인원은 약 18,000명이었으며, 이 중 약 15,000명이 회수 작업에 참여했다. 나머지 대부분은 1960년에 구축된 위성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적도 부근에 설치된 18개 관측소로 구성된 전 세계 추적 네트워크에서 우주선을 추적했다. 이 네트워크는 우주선에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우주 비행사와 지상 간 양방향 통신을 제공했다. 각 관측소는 1300km의 범위를 가졌으며, 우주선은 보통 7분 동안 관측소 상공을 통과했다. 지상에 있는 머큐리 우주 비행사들은 우주선 통신 담당관 역할을 맡아 궤도에 있는 우주 비행사와 통신했다. 우주선에서 수집된 데이터는 고다드 우주 비행 센터에서 이중화된 트랜지스터 기반 IBM 7090 컴퓨터로 처리된 후, 케이프커내버럴의 머큐리 통제 센터로 전송되었다. 통제 센터에서는 세계 지도에 우주선의 위치, 지상 궤적, 30분 이내 비상 착륙 가능 지점 등이 표시되었다.
머큐리 지상 통제와 관련된 다른 컴퓨터로는 케이프커내버럴에 있는 진공관 기반 IBM 709 시스템(발사 중단 필요 여부 및 중단 시 캡슐 착륙 지점 결정), 고다드에 있는 두 대의 IBM 7090 트랜지스터 기반 컴퓨터의 백업 역할을 한 버뮤다의 IBM 709, 발사 중 아틀라스 로켓에 무선 지침을 제공한 Burroughs-GE 시스템이 있었다.
세계 추적 네트워크는 1980년대 위성 중계 시스템으로 대체될 때까지 이후 우주 프로그램에서도 계속 사용되었다. 1965년, 미션 통제 센터는 케이프커내버럴에서 휴스턴으로 이전되었다.
7. 1. 주요 임무
(km)(km)
(km/h)
(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