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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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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머큐리 계획은 1950년대 후반 미국이 소련과의 우주 개발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시작한 최초의 유인 우주 비행 프로그램이다. 이 계획은 7명의 우주 비행사(머큐리 세븐)를 선발하여 훈련시키고, 머큐리 우주선과 발사체를 개발하여, 탄도 비행과 지구 궤도 비행을 수행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머큐리 계획은 비록 소련에 비해 늦게 시작되었지만, 미국의 국위 선양과 과학 기술 발전에 기여했으며, 후속 우주 개발 계획인 제미니, 아폴로 계획의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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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계획
개요
이름머큐리 계획
영어 이름Project Mercury
목표유인 궤도 비행
상태완료됨
기간1958년 – 1963년
국가미국
조직NASA
비용2억 7700만 달러 (1965년)
비용 (인플레이션 조정)2,770,000,000 달러 (인플레이션 조정)
성공 횟수11
실패 횟수3 (MA-1, MA-3, MR-1)
부분적 실패 횟수1 (빅 조 1호)
발사 장소케이프커내버럴
월롭스
탑승체머큐리 캡슐
발사체아틀라스 LV-3B
빅 조
블루 스카우트 II
리틀 조
머큐리-레드스톤
후속 계획제미니 계획아폴로 계획
경쟁 계획보스토크 계획 (소비에트 연방)
임무
최초 비행빅 조 1호
1959년 9월 9일
최초 유인 비행머큐리-레드스톤 3호
1961년 5월 5일
마지막 비행머큐리-아틀라스 9호
1963년 5월 15일
우주선
우주 비행사스콧 카펜터
고든 쿠퍼
존 글렌
거스 그리섬
월리 시라
앨런 셰퍼드
디크 슬레이턴
탑승 인원1명

2. 역사적 배경

1957년 10월 4일 소비에트 연방(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한 것에 대항해 1958년 미국에서 머큐리 계획이 시작되었다. 이 계획은 미 육해공군에서 우주비행사 후보자를 선발해 훈련하고, 로켓과 머큐리 우주선을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머큐리'라는 이름은 로마 신화의 신 머큐리(수성)에서 따왔으며, 유인 머큐리 우주선에 붙은 "7"은 우주비행사 후보자가 7명이었던 것에서 유래한다.[7]

1958년 10월 1일,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설립되어 군사 부문을 제외한 우주 개발을 육해공군으로부터 이어받아, 정부 지원하에 유인 우주비행을 추진했다. 그러나 소련유리 가가린을 통해 1961년 4월 12일 인류 최초의 유인 우주비행을 성공시켰다. 미국은 1961년 5월 5일 앨런 셰퍼드의 머큐리 3호(프리덤 7호)로 탄도 비행에 성공했지만, 궤도 비행은 1962년 2월 20일 존 글렌의 프렌드십 7호가 최초였다.[8]

이후 머큐리 계획은 1963년까지 총 6회의 유인 비행을 완료하고 종료되었다.[8]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5월 15일 "1960년대 안에 달에 유인 비행을 실시한다"라고 선언했고, 머큐리 계획의 성과는 제미니 계획아폴로 계획으로 이어졌다.[9]

2. 1. 냉전과 우주 경쟁

1957년 10월 4일 소비에트 연방(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자, 미국은 "미사일 격차"에 대한 우려에 빠졌다.[1] 이러한 상황은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 간의 치열한 우주 경쟁을 촉발시켰다.

1957년에 발사된 스푸트니크 1호의 복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은 핵무기 경쟁을 벌였다.[2] 소련은 서반구에 폭격기를 배치할 기지가 없었기 때문에 대륙간 탄도 미사일 개발을 추진했고, 이는 미사일 경쟁으로 이어졌다.[2] 로켓 기술 발전은 양국이 통신, 기상 데이터 수집, 정보 수집을 위한 지구 궤도 위성을 개발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3]

소련이 스푸트니크 2호를 태워 발사하면서 유인 우주 비행의 가능성을 시사하자, 미국은 유인 우주 비행 계획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다.[4] 이에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민간 우주 기구 설립을 지시했고, 전미 항공 자문 위원회(NACA)를 기반으로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설립되었다.[5] NASA는 1958년 파이오니어 1호를 발사하며 첫 목표를 달성했고, 다음 목표는 인간을 우주로 보내는 것이었다.[6]

머큐리 계획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58년에 시작되었다.[7] 이 계획은 미 육해공군에서 우주비행사 후보자를 선발하고 훈련하는 동시에, 로켓과 머큐리 우주선을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소련은 유리 가가린을 통해 1961년 4월 12일 인류 최초의 유인 우주비행을 성공시켰다.[8] 미국은 1961년 5월 5일 앨런 셰퍼드의 머큐리 3호(프리덤 7호)를 통해 탄도 비행에 성공했지만, 궤도 비행은 1962년 2월 20일 존 글렌의 프렌드십 7호가 최초였다.[8]

이후 머큐리 계획은 1963년까지 총 6회의 유인 비행을 성공적으로 완료하고 종료되었다.[8]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5월 15일 연설에서 1960년대 안에 달에 유인 비행을 실시하겠다고 선언했고,[9] 머큐리 계획의 성과는 제미니 계획아폴로 계획으로 이어졌다.[9]

2. 2. NASA 설립과 머큐리 계획

1958년 10월 1일,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설립되어, 군사 부문을 제외한 우주 개발을 육해공군으로부터 이어받아 정부의 지원을 받아 유인 우주 비행을 추진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머큐리 계획은 NASA 설립 직후인 1958년 10월 7일에 공식 승인되었고, 12월 17일에 대중에게 발표되었다.

소련1957년 10월 4일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자, 미국은 "미사일 격차"에 대한 우려에 빠졌다. 이에 미국은 1958년 머큐리 계획을 시작했다. 원래는 우주비행사 계획(Project Astronaut)이라고 불렸지만,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조종사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신, 머큐리라는 이름이 고전 신화에서 따왔다. 이는 이미 그리스의 아틀라스와 로마의 유피테르와 같은 이름을 SM-65 및 PGM-19 미사일에 부여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국과 소련 사이에는 핵무기 경쟁이 벌어졌다. 소련은 서반구에 폭격기를 배치할 기지가 없었기 때문에 요시프 스탈린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개발하기로 결정했고, 이는 미사일 경쟁을 촉발했다.[1] 로켓 기술은 양측 모두 통신, 기상 데이터 수집 및 정보를 위해 지구 궤도 위성을 개발할 수 있게 했다.[2]

T. 키스 글레난은 1958년 10월 1일 NASA가 창설될 당시 초대 NASA 국장으로 임명되었고, 휴 L. 드라이든(NACA의 마지막 국장)이 부국장으로 임명되었다.[3] 글레난은 국가 항공 우주 위원회를 통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4] 머큐리 계획을 담당하는 조직은 NASA의 우주 임무 그룹이었으며, 이 프로그램의 목표는 유인 우주선을 지구 궤도에 올리고, 우주에서 조종사의 능력 연구하고, 조종사와 우주선을 안전하게 회수하는 것이었다.[5]

3. 조직 및 시설

머큐리 계획의 제조 시설 및 관제 시설 위치


1958년 10월 1일,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정식 발족되었으며, T. 키스 글레난이 초대 청장, 휴 드라이든이 부청장으로 임명되었다. 머큐리 계획은 NASA 내 '우주 태스크 그룹'이 담당했으며, 유인 우주선 발사, 우주 비행사의 능력 관찰, 안전 귀환을 목표로 했다.[3]

머큐리 우주선 제작에는 12개 회사가 입찰에 참여했으며, 1959년 1월 맥도넬 항공기가 주 계약자로 선정되었다.[4] 노스 아메리칸 항공은 발사 탈출 시스템 개발용 리틀 조 로켓 계약을, 웨스턴 일렉트릭은 세계적인 추적 네트워크 구축 계약을 맺었다.[5][6] 준궤도 발사용 레드스톤 로켓은 크라이슬러가, 아틀라스 로켓은 컨베어가 제조했다.[7][8]

머큐리 계획 관련 주요 회사 및 역할
회사명역할
맥도넬 항공기우주선 제작 주 계약
노스 아메리칸 항공리틀 조 로켓 제작
웨스턴 일렉트릭세계적인 추적 네트워크 구축
크라이슬러레드스톤 로켓 제작
컨베어아틀라스 로켓 제작



우주선은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맥도넬 항공기의 클린룸에서 제작 및 테스트되었고,[9] 약 600개의 하청업체가 참여했다. 최종 품질 관리 및 준비는 케이프 커내버럴의 격납고 S에서 이루어졌다. NASA는 20대의 우주선을 주문했으며, 이 중 일부는 비행하지 않거나 파괴되었다. 여러 대의 보일러플레이트 우주선도 제작되어 테스트에 사용되었다.

맥도넬 항공기의 클린룸에서의 우주선 생산

3. 1. 주요 조직

T. 키스 글레난은 1958년 10월 1일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창설될 당시 초대 NASA 국장으로 임명되었고, 휴 L. 드라이든(국가항공자문위원회(NACA)의 마지막 국장)이 부국장으로 임명되었다.[1] 글레난은 국가 우주 위원회를 통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2] 머큐리 계획을 담당하는 조직은 NASA의 우주 임무 그룹이었으며, 이 프로그램의 목표는 유인 우주선을 지구 궤도에 올리고, 우주에서 조종사의 능력을 연구하고, 조종사와 우주선을 안전하게 회수하는 것이었다.[3]

3. 2. 주요 시설

머큐리 계획에는 다양한 시설이 사용되었다. 유인 발사를 위해 플로리다주 케이프 커내버럴 공군 기지의 대서양 미사일 기지가 미국 공군에 의해 제공되었다. 이곳은 머큐리 제어 센터가 위치한 곳이기도 했다. 통신 네트워크의 컴퓨팅 센터는 메릴랜드주 고다드 우주 비행 센터에 있었다. 리틀 조 로켓은 버지니아주 월롭스 섬에서 발사되었다.

우주 비행사 훈련은 버지니아주 랭글리 연구 센터,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루이스 비행 추진 연구소(현 글렌 연구 센터), 펜실베이니아주 워민스터의 해군 항공 개발 센터 존스빌에서 진행되었다. 랭글리 풍동과 홀로먼 공군 기지의 로켓 썰매 트랙은 공기역학 연구에 사용되었다.

해군과 공군 항공기는 우주선의 착륙 시스템 개발에 사용되었으며, 해군 함선, 해군 및 해병대 헬리콥터는 회수 작업에 사용되었다.

시설위치역할
대서양 미사일 기지플로리다주 케이프 커내버럴유인 로켓 발사, 머큐리 제어 센터
고다드 우주 비행 센터메릴랜드주통신 네트워크 컴퓨팅 센터
월롭스 섬버지니아주리틀 조 로켓 발사
랭글리 연구 센터버지니아주 햄프턴우주 비행사 훈련, 풍동 실험
루이스 비행 추진 연구소 (글렌 연구 센터)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우주 비행사 훈련
해군 항공 개발 센터 존스빌펜실베이니아주 워민스터우주 비행사 훈련
홀로먼 공군 기지뉴멕시코주 알라모고도로켓 썰매 트랙, 공기역학 연구


4. 우주선 및 발사체

발사체: 1. 머큐리-아틀라스 (궤도 비행), 2. 머큐리-레드스톤 (준궤도 비행), 3. 리틀 조 (무인 시험)


머큐리 계획에는 머큐리-레드스톤 발사체, 아틀라스 LV-3B, 리틀 조 로켓이 사용되었다.

머큐리-레드스톤 발사체는 탄도 비행을 위한 약 25.30m (캡슐 및 탈출 시스템 포함) 높이의 단일 로켓 발사체였다.[1] 알코올액체 산소를 연소시켜 약 75000lbf의 추력을 생성하는 액체 연료 엔진을 사용했지만, 궤도 임무에는 충분하지 않았다.[1] 이 로켓은 독일의 V-2을 개량하여[2] 1950년대 초 미국 육군을 위해 개발되었다. 머큐리 계획을 위해 탄두를 제거하고 우주선을 지지하기 위한 칼라와 발사 중 진동을 감쇠시키는 재료를 추가하여 개조되었다.[3] 로켓 모터는 노스 아메리칸 항공에서 생산되었으며, 비행 중 핀을 사용하여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4]

아틀라스 LV-3B는 궤도 비행에 사용되었다.

리틀 조 발사체는 발사 탈출 시스템의 무인 테스트에 사용되었다.[5] 최대 동압(max q)에서 시스템을 테스트하고,[6] 우주 비행사가 가장 심한 진동을 겪는 지점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7] 고체 연료 추진제를 사용했으며, 1958년 미국 항공 자문 위원회(NACA)에서 준궤도 유인 비행을 위해 설계되었지만, 머큐리 계획에서 아틀라스-D 발사를 시뮬레이션하도록 재설계되었다.[8] 노스아메리칸 항공에서 생산되었다.[9]

머큐리-레드스톤과 아틀라스 로켓 모두 자동 중지 장치가 탑재되어, 이상 발생 시 자동으로 비상 탈출용 로켓을 점화했다.[11]

머큐리 우주선 제작은 1959년 1월 맥도넬 항공기 공사가 선정되었다.[12]

4. 1. 머큐리 우주선



머큐리 우주선의 주요 설계자는 NACA 시절부터 유인 우주 비행 연구를 시작한 맥심 파제였다.[1] 우주선은 원뿔 모양이었고, 좁은 끝 부분에 목이 있었다.[2] 길이는 약 3.29m, 폭은 약 1.83m였으며, 발사 탈출 시스템을 추가하면 전체 길이는 약 7.89m였다.[2] 약 2831.68L3의 거주 공간을 가진 캡슐은 단일 승무원 한 명에게 겨우 충분한 크기였다.[3] 내부에는 55개의 전기 스위치, 30개의 퓨즈, 35개의 기계식 레버 등 총 120개의 제어 장치가 있었다.[4] 가장 무거운 우주선인 머큐리-아틀라스 9호의 완전 적재 중량은 약 1360.78kg였다.[5] 외부 덮개는 고온을 견딜 수 있는 니켈 합금인 레네 41로 만들어졌다.[6]

우주선 바닥 부분에는 볼록한 형태의 내열 보호판(아래 그림의 '''2''' 참조)이 설치되어 있었고,[8] 그 내부는 유리 섬유로 여러 겹 덮인 알루미늄 벌집 구조였다.[9] 열 보호판에는 귀환 시 우주선의 속도를 줄이기 위한 3기의 역추진 로켓('''1''')이 스트랩으로 고정되어 있었다.[10] 역추진 로켓 사이에는 발사 최종 단계에서 기체를 로켓에서 분리하여 궤도에 진입시키기 위한 소형 로켓이 있었다.[11] 스트랩은 역추진 로켓 사용 후에 절단되었고, 불필요해진 로켓은 기체에서 분리되었다.[12] 열 보호판 바로 위에는 가압된 선실('''3''')이 있었고,[13] 선내에서는 비행사가 몸에 맞춘 좌석에 안전벨트로 묶였다. 비행사의 눈 앞에는 계기판이, 등 뒤에는 열 보호판이 있었고,[14] 좌석 바로 아래에는 환경 제어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장치는 산소 공급과 선내 온도 조절을 했으며,[15] 이산화 탄소, 수증기, 냄새를 제거하고, 궤도상에서 소변을 수집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16] 선단부에는 회수 장치가 수납된 구획('''4''')이 있었으며,[17] 내부에는 감속용 드로그 슈트 1개와 메인 낙하산 2개(주 낙하산과 예비 낙하산)가 격납되어 있었다.[18] 열 보호판과 선내 바닥 격벽 사이에는 에어백이 수납되어, 착수 직전에 전개하여 충격을 완화했다.[19] 회수 장치보다 더 앞쪽에는 안테나 구획('''5''')이 있었고,[20] 통신용과 우주선 추적용 2기의 안테나가 격납되어 있었다.[21] 또한, 귀환 시 열 보호판이 제대로 진행 방향을 향하도록 자세를 안정시키는 플랩도 설치되어 있었다.[22] 우주선 전방에 부착된 비상 탈출용 로켓('''6''')에는 3기의 고체 연료 로켓이 장착되어 있었다.[23] 발사가 실패했을 경우 비상 탈출용 로켓이 짧은 시간 동안 엔진을 분사하여 우주선을 신속하고 확실하게 발사 로켓에서 멀리 떨어뜨리고, 기체가 해면에 접근하면 낙하산이 전개되어 착수했다.[23]

NASA는 1958년부터 1959년에 걸쳐 세 차례에 걸쳐 머큐리 우주선의 설계를 변경했다.[24] 1958년 11월, NASA는 제출된 설계안 중 "C안"을 채택했지만,[25] 1959년 7월의 시험 비행이 실패한 후 최종 형태인 "D안"이 채택되었다.[26] 내열 보호판의 형태는 1950년대 탄도 미사일 실험을 통해 개발이 진행되었으며, 선단을 둔각으로 하면 발생한 충격파가 우주선 주변의 열을 대부분 분산시키는 것으로 밝혀졌다. 열 보호 대책으로는 히트 싱크 또는 융해제를 보호판에 첨가하는 것이 검토되었는데, 히트 싱크는 보호판 표면에 작은 구멍을 뚫어 공기를 분사하여 열을 발산시키는 방식이고, 융해제는 보호판 표면에 열로 녹는 물질을 발라 증발시켜 열을 빼앗는 방식이다. 무인 시험 결과, 융해제가 채택되었다.

우주선은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맥도넬 에어크래프트사 공장 내의 클린룸에서 제조되었고, 같은 곳의 진공실에서 시험되었다. 600개 가까운 하청 기업 중에는 우주선의 환경 제어 시스템을 제조한 개럿 에어리서치(Garrett AiResearch)사 등이 있었다. 최종 품질 검사 및 준비는 케이프 커내버럴의 S 격납고에서 이루어졌다. NASA는 20기의 우주선을 발주했고, 각각 1번부터 20번까지의 번호가 부여되었지만, 10, 12, 15, 17, 19번 기체는 비행하지 못했다. 3번 기와 4번 기는 무인 비행 시험 중에 파괴되었고, 11번 기는 대서양 바닥에 침몰했다가 38년 후에 회수되었다.

4. 2. 발사체

머큐리 계획에서는 다음 2종류의 발사 로켓이 사용되었다.[1]

구분발사체설명
탄도 비행머큐리-레드스톤 발사체약 25.30m (캡슐 및 탈출 시스템 포함)의 단일 로켓 발사체이다.[1] 알코올액체 산소를 연소시켜 약 75000lbf의 추력을 생성하는 액체 연료 엔진을 사용했지만, 궤도 임무에는 충분하지 않았다.[1] 이 로켓은 독일V-2을 개량하여[1] 1950년대 초 미국 육군을 위해 개발되었다.[1] 머큐리 계획을 위해 탄두를 제거하고 우주선을 지지하기 위한 칼라와 발사 중 진동을 감쇠시키는 재료를 추가하여 개조되었다.[1] 로켓 모터는 노스 아메리칸 항공에서 생산되었으며, 비행 중 핀을 사용하여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1] 핀은 주변 공기를 조절하거나 내부 부품으로 추력을 조절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했다(또는 둘 다 동시에).[1]
궤도 비행아틀라스 LV-3B (아틀라스 D)1950년대 중반에 컨베어사(Convair)가 공군을 위해 개발한[1] 것으로, 산화제에는 액체 산소(LOX)를, 연료에는 케로신을 사용했다.[1] 로켓 자체의 전체 높이는 20미터이지만, 우주선과 비상 탈출용 로켓을 더하면 (로켓과 우주선의 접합부 포함) 29미터가 되었다.[1] 1단은 2기의 엔진으로 이루어진 스커트부로, 로켓 본체에서 연료와 액체 산소를 공급받아[1] 발사 시에는 중앙의 본체 로켓과 함께 연소 가스를 분사하여[1] 우주선을 궤도에 진입시키기에 충분한 추력을 발생시켰다.[1] 1단 분리 후에는 중앙의 본체 로켓이 연소를 계속했다. 본체 로켓에는 스러스터가 장착되어 자이로스코프에 따라 작동했다.[1] 이 2기의 소형 로켓은 본체 측면에 설치되어, 보다 정확하게 기체를 유도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1] 외피는 매우 얇은 스테인리스강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기체가 찌그러지지 않도록 항상 연료 또는 헬륨 가스로 내부에서 압력을 가해줄 필요가 있었다.[1] 이는 연료 무게의 2퍼센트까지 기체의 무게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1] 또한 아틀라스 D는 원래 핵탄두를 탑재하기 위해 설계되었기 때문에, 그보다 무게가 있는 우주선을 싣기 위해서는 기체를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1]



머큐리-레드스톤과 아틀라스 로켓 모두 이상을 감지하는 자동 중지 장치가 탑재되어, 뭔가 이상이 발생한 경우에는 자동으로 비상 탈출용 로켓을 점화하도록 되어 있었다.[1]

왼쪽부터 머큐리-아틀라스, 머큐리-레드스톤, 리틀 조


이 외에 높이 17m의 리틀 조라고 불리는 소형 로켓도 사용되었다. 이것은 발사 탈출 시스템의 무인 테스트용이며, 분리용 로켓 엔진을 가진 모듈 (소위 어보트 타워)이 부착된 우주선이 그 상부에 설치되었다.[1] 그 주요 목적은, 동압이 최대가 되어 우주선을 로켓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가장 어려워지는 최대 동압점 (맥스 Q)이라 하더라도 시스템을 기능하게 하는 것이었다.[1] 리틀 조는 고체 연료 로켓을 사용했으며, 1958년에 NACA에 의해 유인 탄도 비행을 목적으로 설계되었지만, 머큐리 계획에서 아틀라스 D의 발사를 시뮬레이션하는 것을 목적으로 재설계되었다.[1] 기체의 제작은 노스 아메리칸 항공이 했다.[1]

5. 우주 비행사

1959년 NASA는 머큐리 계획에 참가할 우주비행사를 모집했다. 선발 기준은 테스트 파일럿 출신이어야 하고, 나이는 40세, 체중은 82kg, 키는 178cm를 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존 글렌이 머큐리 우주복을 착용한 모습


우주 비행사는 고열 차폐막을 등지고 앉은 자세를 취했는데, 이는 인간이 발사 및 재진입 시 높은 G-포스를 견디는 데 가장 적합한 자세였기 때문이다. 각 우주 비행사의 우주복을 입은 신체에 맞춰 맞춤 제작된 유리 섬유 좌석은 최대한의 지지력을 제공했다. 왼손 근처에는 자동 트리거가 고장 났을 경우 발사 전이나 발사 중에 필요한 경우 발사 탈출 시스템을 활성화하기 위한 수동 비상 탈출 손잡이가 있었다.[1]

기내 환경 제어 시스템을 보완하기 위해, 우주비행사는 자체 산소 공급 장치가 있는 압력복을 착용했는데, 이 압력복은 그를 시원하게 해 주었다.[1] 해수면에서 공기(질소/산소)와 동일한 조성을 가진 것 대신 5.5psi (약 7559.04m 고도와 동일)의 저압 순수 산소의 기내 대기가 선택되었다.[1] 이는 제어하기가 더 쉬웠고, 감압병("잠수병")의 위험을 피했으며, 우주선 무게를 절약했다. 화재(머큐리 계획 기간 동안 발생하지 않음)는 기내의 산소를 비움으로써 진압해야 했다.[1] 이러한 경우 또는 어떤 이유로든 기내 압력이 고장 났을 경우, 우주 비행사는 생존을 위해 자신의 우주복에 의존하여 지구로 비상 귀환할 수 있었다.[1] 우주 비행사들은 일반적으로 바이저를 올린 채 비행했는데, 이는 우주복이 팽창되지 않았음을 의미했다.[1] 바이저를 내리고 우주복을 팽창시키면 우주 비행사는 중요 버튼과 손잡이가 배치된 측면 및 하단 패널에만 도달할 수 있었다.[1]

우주 비행사는 가슴에 전극을 착용하여 심장 박동을 기록하고, 혈압을 측정할 수 있는 커프, 체온을 기록하기 위한 직장 체온계를 착용했다(마지막 비행에서는 구강 체온계로 대체됨).[1] 이러한 데이터는 비행 중에 지상으로 전송되었다.[1] 우주 비행사는 일반적으로 물을 마시고 음식 펠릿을 먹었다.[1]

궤도에 진입하면, 우주선은 요, 피치, 롤로 회전할 수 있었다. 즉, 종축을 따라(롤), 우주 비행사의 시점에서 좌우로(요), 위아래로(피치) 회전할 수 있었다.[1] 움직임은 로켓 엔진에 의해 생성되었으며, 이 엔진은 과산화수소를 연료로 사용했다.[1] 방향을 잡기 위해, 조종사는 앞의 창을 통해 보거나 360° 회전할 수 있는 카메라가 장착된 잠망경에 연결된 화면을 볼 수 있었다.[1]

머큐리 우주 비행사들은 우주선의 개발에 참여했으며, 수동 제어 및 창이 설계의 요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 그 결과, 우주선 이동 및 기타 기능은 지상 기지를 통과할 때 지상에서 원격으로, 기내 계측기에 의해 자동으로, 또는 다른 두 가지 방법을 대체하거나 재정의할 수 있는 우주 비행사에 의해 수동으로 제어할 수 있었다. 경험은 수동 제어에 대한 우주 비행사의 주장을 입증했다. 그것 없이는 마지막 비행 동안 고든 쿠퍼의 수동 재진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1]

머큐리 계획 이전에는 우주비행사 선발을 위한 규정이 없었으므로, NASA는 선발 과정과 초기 우주비행사 후보 선정 모두에서 광범위한 선례를 세우게 되었다. 처음에는 암벽 등반가나 곡예사와 같은 스릴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지원을 허용하려 했지만, NASA 관계자들에 의해 기각되었다. 1958년 말, NASA 관계자들은 테스트 파일럿을 선발 풀의 핵심으로 삼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로 결정했다.[11]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주장에 따라, 후보군은 현역 군인 테스트 파일럿으로 더욱 좁혀졌다. 당시에는 여성이 군에서 비행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므로 테스트 파일럿 자격을 얻을 수 없었다.

후보자는 25세에서 40세 사이여야 하며, 키는 180cm를 넘지 않아야 하고, STEM 분야의 대학 학위를 소지해야 한다는 조건이 추가되었다. 대학 학위 요구 사항으로 인해, 음속을 돌파한 최초의 인물인 척 예거는 제외되었다.[12] 존 글렌 역시 대학 학위가 없었지만, 영향력 있는 친구들을 이용하여 선발 위원회가 그를 받아들이도록 했다.

원래 508명 중 110명의 후보가 면접을 위해 선정되었으며, 면접을 통해 32명이 추가적인 신체 및 정신 검사를 위해 선정되었다. 특별 챔버에서 그들은 혼란스러운 조건에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지 테스트를 받았다. 후보들은 자신에 대해 500개 이상의 질문에 답해야 했고, 다양한 이미지에서 무엇을 보는지 설명해야 했다. 이러한 테스트 후에는 6명의 우주비행사로 후보군을 좁힐 예정이었지만, 결국 7명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우주비행사들은 선발 과정에서 사용된 것과 동일한 몇 가지 훈련을 포함하는 훈련 프로그램을 거쳤다. 그들은 해군 항공 개발 센터에서 원심 분리기를 사용하여 발사 및 재진입의 중력 가속도 프로파일을 시뮬레이션했다. 무중력 훈련은 항공기에서 진행되었으며, 처음에는 2인승 전투기의 뒷좌석에서, 나중에는 개조되고 패딩 처리된 화물기 내부에서 진행되었다. 그들은 루이스 비행 추진 연구소의 MASTIF(Multi-Axis Spin-Test Inertia Facility)라는 기계에서 우주선의 자세 제어 핸들을 사용하여 회전하는 우주선을 제어하는 연습을 했다.[14][15] 궤도에서 올바른 자세를 찾는 추가 조치로, 천체투영관과 시뮬레이터에서 별과 지구 인식 훈련이 진행되었다. 통신 및 비행 절차는 비행 시뮬레이터에서 연습되었으며, 처음에는 단 한 명의 보조자와 함께, 나중에는 미션 관제 센터와 함께 연습했다. 회수 훈련은 랭글리 공군 기지의 수영장에서, 나중에는 잠수부와 헬리콥터 승무원과 함께 바다에서 진행되었다.

5. 1. 머큐리 세븐

1959년 NASA는 머큐리 계획에 참가할 7명의 우주비행사를 모집했고 도널드 슬레이튼, 앨런 셰퍼드, 월터 시라, 버질 그리섬, 존 글렌, 고든 쿠퍼, 스콧 카펜터가 선발되었다. 이들을 머큐리 세븐이라고 불렀다.

왼쪽부터 그리섬, 셰퍼드, 카펜터, 시러, 슬레이턴, 글렌, 쿠퍼. 1962년


선발 기준은 테스트 파일럿(비행기를 개발했을 때 처음 시험하는 베테랑 비행사) 출신이어야 하고, 나이는 40세, 체중은 82kg, 키는 178cm를 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1959년 4월 9일, NASA는 머큐리 세븐으로 알려진 다음의 7명의 우주 비행사를 발표했다.[1]

이름소속생몰년
스콧 카펜터해군1925년~2013년
고든 쿠퍼공군1927년~2004년
존 허셜 글렌해병대1921년~2016년
거스 그리섬공군1926년~1967년
월터 시러해군1923년~2007년
앨런 셰퍼드해군1923년~1998년
도널드 슬레이턴공군1924년~1993년



셰퍼드는 1961년 5월에 탄도 비행에 성공하여, 우주에 간 최초의 미국인이 되었다.[1] 그는 아폴로 14호에서도 비행하여, 머큐리 세븐 중에서 유일하게 달 표면에 착륙했다.[1] 그리섬은 미국인으로서 두 번째로 우주에 갔으며, 제미니 계획아폴로 계획에도 참가했지만, 1967년 1월 아폴로 1호의 사고로 사망했다.[1] 글렌은 1962년 2월에 지구 궤도에 도달한 최초의 미국인이 되었고, NASA를 은퇴하여 정치가가 되었지만, 1998년에 우주왕복선STS-95로 비행사로 복귀했다.[1] 슬레이턴은 건강상의 이유로 머큐리 계획에 참여하지 못하고, 1962년부터 NASA에 직원으로 남았지만, 1975년에 아폴로-소유스 테스트 계획에서 비행했다.[1] 쿠퍼는 머큐리 마지막 비행에서 가장 오랫동안 우주에 체류했으며, 제미니 계획에서도 비행했다.[1] 카펜터는 머큐리 계획이 유일한 우주 비행이었다. 시러는 머큐리 계획에서 세 번째 지구 궤도 비행에 참여했으며, 제미니 계획에도 참가했다. 3년 후 아폴로 7호에서 선장을 맡아, 머큐리, 제미니, 아폴로 3개의 계획에서 우주에 간 유일한 우주 비행사가 되었다.

비행사들의 임무에는 홍보 활동도 포함되어, 언론 인터뷰, 계획 관련 시설 방문 및 직원들과의 대화 등을 했다.[1] 비행사들은 이동을 위해 제트 전투기 사용을 요구했다.[1] 언론에서는 존 글렌이 가장 호평을 받았으며, 머큐리 세븐의 대표처럼 여겨졌다.[1] 비행사들은 『라이프』지에 수기를 기고했고, 라이프 지는 그들을 애국적이고 신앙심이 깊으며 가족을 생각하는 남성으로 묘사했다.[1]

5. 2. 선발 및 훈련

1959년 NASA는 머큐리 계획에 참가할 우주비행사 7명을 모집했는데, 도널드 슬레이튼, 앨런 셰퍼드, 월터 시라, 버질 그리섬, 존 글렌, 고든 쿠퍼, 스콧 카펜터가 선발되었다. 선발 기준은 테스트 파일럿 출신이어야 하고, 나이는 40세, 체중은 82kg, 키는 178cm를 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NASA는 1959년 4월 9일 머큐리 세븐으로 알려진 7명의 우주 비행사를 발표했다.[1]

이름발사계급부대출생사망
M. 스콧 카펜터1962년 5월 24일중위미 해군(USN)1925년2013년
L. 고든 쿠퍼1963년 5월 15일대위미 공군(USAF)1927년2004년
존 H. 글렌 주니어1962년 2월 20일소령미 해병대(USMC)1921년2016년
버질 I. 그리섬1961년 7월 21일대위미 공군1926년1967년
월터 M. 시라 주니어1962년 10월 3일중령미 해군1923년2007년
앨런 B. 셰퍼드 주니어1961년 5월 5일중령미 해군1923년1998년
도널드 K. 슬레이턴소령미 공군1924년1993년


  • 앨런 셰퍼드는 1961년 5월 5일 준궤도 비행에 성공하여 미국 최초의 우주인이 되었다.[5] 그는 아폴로 14호에서 달을 걸은 유일한 머큐리 우주 비행사가 되었다.[6]
  • 거스 그리섬은 1961년 7월 21일 머큐리-레드스톤 4호에서 두 번째 미국인 우주인이 되었다. 그는 제미니와 아폴로 계획에 참여했지만 1967년 1월 아폴로 1호 발사 전 테스트 중 사망했다.[7]
  • 존 글렌은 1962년 2월 20일 머큐리-아틀라스 6호에서 지구 궤도를 돈 최초의 미국인이 되었다. 그는 1964년 NASA를 그만두고, 나중에 미국 상원에 선출되어 1974년부터 1999년까지 재임했다. 재임 기간 중 그는 1998년 STS-95호에 탑승하여 우주로 돌아갔다.[8]
  • 스콧 카펜터는 1962년 5월 24일 머큐리-아틀라스 7호에 탑승했다. 그 후 그는 해군의 "바다 속의 인간"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우주 비행사이자 수중 탐험가인 유일한 미국인이 되었다.[9]
  • 월리 시라는 1962년 10월 3일 ''시그마 7''에 탑승하여 머큐리-아틀라스 8호를 비행했다. 1965년 12월 시라는 제미니 6A호를 비행하여 최초의 우주 랑데부를 달성했다. 3년 후 그는 아폴로 7호를 지휘하여 머큐리, 제미니, 아폴로 프로그램을 모두 비행한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 고든 쿠퍼는 1963년 5월 15일 머큐리-아틀라스 9호로 프로젝트 머큐리의 마지막 비행을 했다. 그는 나중에 제미니 계획에 참여하여 제미니 5호에서 다시 한 번 지구력 기록을 깼다.[10]
  • 데케 슬레이턴은 1962년 심장 질환으로 인해 비행이 중단되었지만 NASA에 남아 우주 비행사 사무소의 수석 관리자로 임명되었다. 1972년 3월 13일 슬레이턴은 비행 상태로 복귀했고 다음 해에 아폴로-소유스 시험 계획에 배정되어 1975년에 성공적으로 비행했다.


우주 비행사들의 임무 중 하나는 홍보였는데, 그들은 언론과 인터뷰를 하고 프로젝트 머큐리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 제조 시설을 방문했다. 언론은 특히 7명 중 최고의 연설가로 여겨졌던 존 글렌을 좋아했다. 그들은 그들을 '애국적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장(家長)들'로 묘사한 ''라이프'' 잡지에 개인적인 이야기를 팔았다.

머큐리 계획 이전에는 우주비행사 선발을 위한 규정이 없었으므로, NASA는 선발 과정과 초기 우주비행사 후보 선정 모두에서 광범위한 선례를 세우게 되었다. 처음에는 암벽 등반가나 곡예사와 같은 스릴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지원을 허용하려 했지만, NASA 관계자들에 의해 기각되었다. 1958년 말, NASA 관계자들은 테스트 파일럿을 선발 풀의 핵심으로 삼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로 결정했다.[11]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주장에 따라, 후보군은 현역 군인 테스트 파일럿으로 더욱 좁혀졌다. 이 항공 조종사들은 최첨단 항공기를 조종하는 데 능숙했기 때문에, 새로운 우주비행사 직책에 가장 적합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11] 당시에는 여성이 군에서 비행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므로 테스트 파일럿 자격을 얻을 수 없었다.

후보자는 25세에서 40세 사이여야 하며, 키는 180cm를 넘지 않아야 하고, STEM 분야의 대학 학위를 소지해야 한다는 조건이 추가되었다. 대학 학위 요구 사항으로 인해, 척 예거는 제외되었는데, 그는 음속을 돌파한 최초의 인물이었다.[12] 존 글렌 역시 대학 학위가 없었지만, 영향력 있는 친구들을 이용하여 선발 위원회가 그를 받아들이도록 했다.

원래 508명 중 110명의 후보가 면접을 위해 선정되었으며, 면접을 통해 32명이 추가적인 신체 및 정신 검사를 위해 선정되었다. 특별 챔버에서 그들은 혼란스러운 조건에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지 테스트를 받았다. 후보들은 자신에 대해 500개 이상의 질문에 답해야 했고, 다양한 이미지에서 무엇을 보는지 설명해야 했다. 이러한 테스트 후에는 6명의 우주비행사로 후보군을 좁힐 예정이었지만, 결국 7명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우주비행사들은 선발 과정에서 사용된 것과 동일한 몇 가지 훈련을 포함하는 훈련 프로그램을 거쳤다. 그들은 해군 항공 개발 센터에서 원심 분리기를 사용하여 발사 및 재진입의 중력 가속도 프로파일을 시뮬레이션했다. 무중력 훈련은 항공기에서 진행되었으며, 처음에는 2인승 전투기의 뒷좌석에서, 나중에는 개조되고 패딩 처리된 화물기 내부에서 진행되었다. 그들은 루이스 비행 추진 연구소의 MASTIF(Multi-Axis Spin-Test Inertia Facility)라는 기계에서 우주선의 자세 제어 핸들을 사용하여 회전하는 우주선을 제어하는 연습을 했다.[14][15] 궤도에서 올바른 자세를 찾는 추가 조치로, 천체투영관과 시뮬레이터에서 별과 지구 인식 훈련이 진행되었다. 통신 및 비행 절차는 비행 시뮬레이터에서 연습되었으며, 처음에는 단 한 명의 보조자와 함께, 나중에는 미션 관제 센터와 함께 연습했다. 회수 훈련은 랭글리 공군 기지의 수영장에서, 나중에는 잠수부와 헬리콥터 승무원과 함께 바다에서 진행되었다.

6. 비행 계획

머큐리 계획의 비행은 크게 탄도 비행과 궤도 비행 두 가지로 나뉜다.[10]

탄도 비행은 레드스톤 로켓을 사용하여 2분 30초 동안 우주선을 32nmi 고도까지 상승시킨 후, 로켓이 분리되면 포물선 궤도를 그리며 관성 비행을 하는 방식이다.[5][6] 발사 후 자연 낙하하므로 역분사 로켓은 원래 필요하지 않았지만, 성능 검증을 위해 점화되었다. 탄도 비행과 궤도 비행 모두 우주선은 대서양에 착수했다.[7] 탄도 비행은 약 15분 동안 진행되었으며, 고도는 102nmi에서 103nmi, 비행 거리는 262nmi에 도달했다.[8][9]

탄도 비행 상세 (점선: 무중력 구간)


궤도 비행에서는 아틀라스 로켓 엔진이 발사 4초 전에 점화된다. 충분한 추력이 발생하면 고정 장치가 해제되고 발사된다.(A)[1] 발사 30초 후, 동압이 최대가 되는 지점(Max Q)에서 비행사는 심한 진동을 느낀다.[2] 2분 10초 후, 1단 스커트부가 분리되고(B)[1], 비상 탈출 로켓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므로 분리된다.(C)[3]

이후 로켓은 점차 수평으로 기울어지고, 발사 5분 10초 후, 고도 87nmi에서 우주선이 궤도에 진입한다.(D)[4] 이때 3개의 소형 로켓이 1초간 점화되어 우주선이 로켓과 분리된다.[6] 엔진 정지 직전에는 8G(탄도 비행은 6G)의 가속도가 발생한다.[2][7] 궤도에 진입하면 우주선은 자동으로 180° 회전하여 역분사 로켓을 전방으로 향하게 하고, 기수를 14.5° 아래로 기울인다. 이는 지상과의 통신을 위한 것이다.[8][9]

일단 궤도에 진입하면, 대기권 재진입을 제외하고는 궤도 변경이 불가능하다.[10] 지구 한 바퀴는 보통 88분이 걸린다.[11] 궤도의 가장 낮은 지점인 근지점은 약 87nmi 고도이며, 가장 높은 지점인 원지점은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다.[12]

귀환 시(E)에는 아래쪽 각도가 34°로 증가한다.[8] 역분사 로켓은 10초씩 연소되며, 5초 간격으로 순차 점화된다.(F)[6][13] 재진입 시(G) 비행사는 8G(탄도 비행은 11~12G)의 가속도를 경험하며,[14] 내열 보호판 온도는 3000°F까지 상승한다. 이때 공기 이온화로 인해 2분간 통신 두절(블랙아웃)이 발생한다.[15][16]

재진입 후, 고도 약 6400.80m에서 소형 낙하산(드로그 슈트)이 전개되어 자세를 안정시키고(H)[17], 약 3048.00m에서 주 낙하산이 전개된다.(I) 주 낙하산은 처음에는 작게 열리고 수 초 후 완전히 펼쳐진다.[18] 착수 직전, 내열 보호판 뒤의 에어백이 팽창하여 충격을 완화한다.(J)[18] 착수 후에는 낙하산을 분리하고,[19] 안테나를 펼쳐 전파 비콘을 발신한다.(K) 또한, 녹색 염료를 뿌려 식별을 용이하게 한다.[19]

궤도 비행 상세 (A-D: 발사, E-K: 귀환 및 착수)


머큐리 계획의 유인 비행은 모두 성공했지만, 일부 비행은 계획 단계에서 취소되었다.[18] 비행 중 주요 문제는 개인 위생과 비행 후 기립성 저혈압이었다.[18] 유인 임무 번호는 무인 비행 시험 때문에 1번부터 시작하지 않았고,[18] "머큐리-레드스톤"(MR, 준궤도 비행)과 "머큐리-아틀라스"(MA, 궤도 비행)라는 두 가지 번호 체계가 사용되었다. 우주비행사들은 7명의 우주비행사를 기념하여 "7"로 끝나는 우주선 이름을 직접 지었다.[18] 우주선 생산 번호는 임무 순서와 일치하지 않았고, 일부는 예비용으로 보관되거나 시험에 사용되었다.[18] 시간은 UTC 기준이며, 현지 시간보다 5시간 빠르다.
주요 유인 비행:

임무우주선 번호호출 부호조종사발사비행 시간궤도원지점
(km)
근지점
(km)
최대 속도
(km/h)
빗나감
(km)
시간장소
MR-37Freedom 7셰퍼드1961년 5월 5일 14:34LC-515분 22초01888,2625.6
MR-411Liberty Bell 7그리섬1961년 7월 21일 12:20LC-515분 37초01908,3179.3
MA-613Friendship 7글렌1962년 2월 20일 14:47LC-144시간 55분 23초326116128,23474
MA-718Aurora 7카펜터1962년 5월 24일 12:45LC-144시간 56분 5초326916128,242400
MA-816Sigma 7시라1962년 10월 3일 12:15LC-149시간 13분 15초628316128,2577.4
MA-920Faith 7쿠퍼1963년 5월 15일 13:04LC-141일 10시간 19분 49초2226716128,2398.1


비고:


  • MR-3: 최초의 미국인 우주 비행.[18] USS ''Lake Champlain''에 의해 회수.[18]
  • MR-4: 회수 중 우주선 침몰.[18] USS ''Randolph''에 의해 우주비행사 구조.[18]
  • MA-6: 최초의 미국 궤도 비행.[18] USS ''Noa''에 의해 회수.[18]
  • MA-7: 카펜터가 데이크 슬레이턴 대체.[18] USS ''Farragut''에 의해 회수.[18] 가장 큰 착륙 오차 발생.[18]
  • MA-8: 가장 계획에 근접한 비행.[18] USS ''Kearsarge''에 의해 회수.[18]
  • MA-9: 최초의 미국인 1일 이상 우주 비행, 마지막 미국 단독 임무.[18] USS ''Kearsarge''에 의해 회수.[18]

6. 1. 탄도 비행

NASA는 미지의 우주 환경에 인간이 도전하기 전에, 무인 로켓 발사와 동물 실험을 통해 안전성을 검증했다. 이 과정에서 두 마리의 원숭이(샘과 미스샘)와 한 마리의 침팬지()가 준궤도 비행에 성공했고, 침팬지(에노스)는 궤도 비행에 성공했다.

1961년 5월 5일,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의 레드스톤 로켓에 의해 앨런 셰퍼드 중령의 유인 시험 비행(탄도 비행, 고도 2,000km, 비행 시간 15분)이 성공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이 결과를 바탕으로 아폴로 계획을 결정했다. 한편, 소련에서는 유리 가가린 소령이 4월 12일 인류 최초의 우주 비행에 성공했다. 앨런 셰퍼드에 이어 V. 그리솜이 1961년 7월 21일 탄도 비행을 성공시켰고, 8월 6일 소련의 티토프 소령은 지구를 17바퀴 도는 우주 비행을 완료했다.

머큐리-레드스톤 발사체는 탄도 비행을 위한 단일 로켓 발사체였다(캡슐 및 탈출 시스템 포함).[1] 이 로켓은 알코올과 액체 산소를 연소시켜 약 75lbf의 추력을 생성하는 액체 연료 엔진을 사용했지만, 궤도 임무에는 충분하지 않았다.[1] 이 로켓은 독일 V-2의 후손이며,[2] 1950년대 초 미국 육군을 위해 개발되었다. 머큐리 계획을 위해 탄두를 제거하고 우주선을 지지하기 위한 칼라와 발사 중 진동을 감쇠시키는 재료를 추가하여 개조되었다.[3] 로켓 모터는 노스 아메리칸 항공에서 생산되었으며, 비행 중 핀을 사용하여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핀은 주변 공기를 조절하거나 내부 부품으로 추력을 조절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했다(또는 둘 다 동시에).[2] 아틀라스-D와 레드스톤 발사체 모두 문제가 발생할 경우 발사 탈출 시스템을 발사하여 발사를 중단할 수 있는 자동 중단 감지 시스템을 포함했다.[4]

레드스톤 로켓은 2분 30초 동안 캡슐을 32nmi 고도로 올리는 데 사용되었으며, 캡슐은 부스터 분리 후 탄도 곡선을 그리며 계속 상승했다.[5][6] 발사 탈출 시스템은 동시에 투기되었다. 곡선 정상에서 우주선의 감속 로켓이 시험 목적으로 발사되었으며, 궤도 속도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재진입에는 필요하지 않았다. 우주선은 대서양에 착륙했다.[7] 준궤도 비행은 약 15분 소요되었고, 원지점 고도는 에서 였으며, 사정거리는 262nmi였다.[8][9] 부스터-우주선 분리 시점부터 공기가 우주선의 속도를 늦추기 시작하는 재진입 시점까지, 조종사는 이미지에 표시된 대로 무중력을 경험하게 된다. 회수 절차는 궤도 비행과 동일하다.

시간표 (분:초)
0:00발사
2:22발사체 차단 및 타워 분리
2:32우주선 분리
2:37방향 전환
5:14역추진
6:14감속 팩 투기
7:48재진입
9:38드로구 낙하산 전개
10:15주 낙하산 전개
15:22착륙



탄도 비행의 상세. 점선은 무중력 기간을 나타낸다.


머큐리 계획에는 탄도 비행, 궤도(지구 궤도) 비행의 두 종류의 비행 계획이 있었다.[10] 탄도 비행에는 레드스톤을 사용, 2분 30초의 연소로 우주선을 고도 32nmi까지 상승시키고, 로켓 분리 후 포물선을 그리며 관성으로 비행했다.[5][6] 발사 후 자연스럽게 낙하하기 때문에 역분사 로켓은 원래 필요하지 않았지만, 성능을 검증하기 위해 점화되었다. 우주선은 탄도 비행, 궤도 비행 모두 대서양으로 귀환했다.[7] 착수 후에는 잠수사가 기체의 자세를 안정시키기 위한 튜브를 부착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탄도 비행에서는 준비가 되지 않았다.[7] 탄도 비행에서는 15분간 비행하여 고도 에서 , 사정거리는 262nmi에 도달했다.[8][9]

6. 2. 궤도 비행

NASA는 인간을 우주로 보내기 전에 무인 로켓 발사와 동물 실험을 통해 안전성을 검증했다. 이 과정에서 샘과 미스샘이라는 두 마리의 원숭이이라는 침팬지가 준궤도 비행에 성공했고, 에노스라는 침팬지가 궤도 비행에 성공했다.

1961년 5월 5일,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의 레드스톤 로켓을 이용한 앨런 셰퍼드 중령의 유인 시험 비행(탄도 비행)이 성공했다. 이 성공으로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아폴로 계획을 결정하게 되었다. 같은 해 4월 12일, 소련유리 가가린 소령이 인류 최초로 우주 비행에 성공했다. 1961년 7월 21일, V. 그리솜이 탄도 비행을 성공한 후, 8월 6일 소련의 티토프 소령이 지구를 17바퀴 도는 우주 비행을 마쳤다.

1963년 5월, 머큐리 계획은 종료되었다.

궤도 비행에서 아틀라스 로켓 엔진은 발사 4초 전에 점화된다. 로켓은 고정 장치로 고정되어 있으며, 충분한 추력이 발생하면 후크가 풀리고 발사대를 떠난다 ('''A''')[1]. 30초 후 동압이 최대가 되는 맥스 Q에 도달하며, 이때 비행사는 심한 진동에 노출된다[2]. 2분 10초 후, 제1단 스커트부가 분리된다 ('''B''')[1]. 이 시점에서 비상 탈출용 로켓은 필요 없으므로, 분리용 로켓에 점화하여 투기된다 ('''C''')[3].

로켓은 그 후 점차 진로를 수평으로 기울여, 발사 5분 10초 후, 고도 87해리 (161킬로미터)에서 우주선이 궤도에 진입한다 ('''D''')[4]. 세계 여러 국가에서 인공위성은 지구의 자전을 이용하기 위해 동쪽으로 발사되는 것이 일반적이다[1][5]. 여기서 3기의 분리용 소형 로켓이 1초간 점화되어, 우주선은 로켓에서 분리된다[6]. 엔진을 정지하기 직전에는 가속도가 8G에 달한다 (탄도 비행에서는 6G)[2][7]. 궤도에 진입하면 우주선은 자동으로 180° 방향을 바꾸고, 역분사용 로켓을 전방으로 향하게 하며 기수를 14.5° 하방으로 기울인 자세가 된다. 기수를 아래로 향하게 하는 것은, 지상과의 통신에 필요하기 때문이다[8][9]. 일단 궤도에 진입하면, 우주선은 귀환을 위해 대기권 재진입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궤도를 변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10].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데는 보통 88분이 소요된다[11]. 궤도에 진입하는 것은 근지점이라고 불리는 궤도가 가장 낮아지는 지점으로, 고도는 약 87해리 (161 km)이다. 반대로 가장 높아지는 지점은 원지점이라고 불리며,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다[12]. 귀환 시 ('''E''')에는 아래쪽 각도가 34°까지 증가한다[8]. 역분사 로켓의 연소 시간은 1기가 10초이며, 하나가 점화된 후 각각 5초 간격으로 차례로 분사된다 ('''F''')[6][13]. 재진입 동안 ('''G'''), 비행사에게는 8G (탄도 비행에서는 11~12G)의 가속도가 가해진다[14]. 내열 보호판 주변의 온도는 3000°F에 달하며, 이때 우주선 주변의 공기가 고온으로 인해 이온화되므로, 블랙아웃이라고 불리는 통신이 두절되는 시간대가 2분 정도 발생한다[15][16]. 재진입 후, 고도 약 6400.80m에서 자세를 안정시키기 위한 드로그 슈트라고 불리는 소형 낙하산이 전개되고 ('''H''')[17], 그 후 고도 약 3048.00m에서 메인 낙하산이 전개된다 ('''I''')[17]. 로프에 걸리는 장력을 줄이기 위해 처음에는 작게 열리고, 수 초 후에 완전히 열린다[18]. 착수 직전,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내열 보호판 뒤에 있는 에어백이 전개된다 ('''J''')[18]. 착수하면 낙하산을 분리하고[19], 안테나가 펴지고 함선이나 헬리콥터가 추적할 수 있도록 전파 비콘이 발신된다 ('''K''') [19]. 또한 하늘에서 식별하기 쉽도록, 녹색 염료가 우주선 주변에 흘러나온다[19].

6. 3. 주요 비행

머큐리 계획의 유인 비행은 모두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계획 도중 일부 비행은 취소되었다.[18] 주요한 의학적 문제는 간단한 개인 위생과 비행 후 기립성 저혈압 증상이었다.[18] 발사체는 무인 비행을 통해 시험되었기 때문에 유인 임무의 번호는 1번부터 시작하지 않았다.[18] 또한 "머큐리-레드스톤"(준궤도 비행)을 의미하는 MR과 "머큐리-아틀라스"(궤도 비행)를 의미하는 MA, 두 개의 별도 번호 체계가 있었다. 우주 비행사들이 파일럿 전통에 따라 각자 우주선에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은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7명의 우주 비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7"로 끝나는 이름을 선택했다.[18] 우주선 생산 번호는 임무 순서와 일치하지 않으며, 일부 캡슐은 예비용으로 보관되거나 테스트에 사용되었다.[18] 시간은 협정 세계시(UTC)를 기준으로 하며, 현지 시간에서 5시간을 더한다.

임무우주선 번호호출 부호조종사발사비행 시간궤도원지점
(km)
근지점
(km)
최대 속도
(km/h)
빗나감
(km)
시간장소
MR-37Freedom 7셰퍼드1961년 5월 5일 14:34LC-515분 22초01888,2625.6
MR-411Liberty Bell 7그리섬1961년 7월 21일 12:20LC-515분 37초01908,3179.3
MA-613Friendship 7글렌1962년 2월 20일 14:47LC-144시간 55분 23초326116128,23474
MA-718Aurora 7카펜터1962년 5월 24일 12:45LC-144시간 56분 5초326916128,242400
MA-816Sigma 7시라1962년 10월 3일 12:15LC-149시간 13분 15초628316128,2577.4
MA-920Faith 7쿠퍼1963년 5월 15일 13:04LC-141일 10시간 19분 49초2226716128,2398.1



비고
머큐리-레드스톤 3최초의 미국인 우주 비행.[18] 항공모함 USS Lake Champlain에 의해 회수되었다.[18]
머큐리-레드스톤 4해치가 예상치 않게 날아가면서 회수 과정에서 우주선이 침몰했다.[18] 우주 비행사는 항공모함 USS Randolph에 의해 회수되었다.[18]
머큐리-아틀라스 6최초의 미국 궤도 비행.[18] 재진입 중 반사 팩을 유지했다.[18] 구축함 USS Noa에 의해 회수되었다.[18]
머큐리-아틀라스 7카펜터는 데이크 슬레이턴을 대신했다.[18] 구축함 USS Farragut에 의해 회수되었다.[18] 가장 큰 빗나감.[18]
머큐리-아틀라스 8계획에 가장 가까운 비행.[18] 기동 테스트를 수행했다.[18] 항공모함 USS Kearsarge에 의해 회수되었다.[18]
머큐리-아틀라스 9최초의 미국인 1일 이상 우주 비행.[18] 마지막 미국 단독 임무.[18] USS Kearsarge에 의해 회수되었다.[18]
회수 변동MA6) 우주선과 우주 비행사를 직접 탑승시켰고, MA8) 우주선과 우주 비행사를 보트로 끌어다 배에 탑승시켰으며, MA9) 우주 비행사를 태운 우주선을 배로 비행시켰다.[18]


6. 4. 취소된 계획

계획명식별명비행사예정 발사일취소 결정일시비고
머큐리-주피터 1호1959년 1월 1일[1]
머큐리-주피터 2호침팬지1960년 1~3월1959년 1월 1일[1]우주선의 최대 동압 시험을 수행하는 것이 제안되었다.
머큐리-레드스톤 5호영어글렌 (예정)1960년 3월[2]1961년 8월[3]다른 4명의 비행사들에 의한 탄도 비행이 계획되었다.[2]
머큐리-레드스톤 6호1960년 4월[2]1961년 7월[4]
머큐리-레드스톤 7호1960년 5월[2]
머큐리-레드스톤 8호1960년 6월[2]
머큐리-아틀라스 10호Freedom 7-II|프리덤 7-II영어셰퍼드1963년 10월1963년 6월 13일3일간의 비행을 예정. 1962년 11월, 내열 보호판에 추가 보급 물품을 장착하여 3일간의 비행을 수행할 계획이었다. 1963년 1월까지 머큐리-아틀라스 9호의 대체 안으로 1일 비행으로 변경되었으나, 9호가 성공하면서 취소되었다.[5]
머큐리-아틀라스 11호그리섬1963년 10~12월1962년 10월1일간의 비행을 예정.
머큐리-아틀라스 12호실러1963년 10~12월1962년 10월1일간의 비행을 예정.


7. 지상 관제

머큐리 계획 지원 인원은 약 18,000명이었으며, 이 중 약 15,000명이 회수 작업에 참여했다. 나머지 대부분은 1960년에 구축된 위성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적도 부근에 설치된 18개 관측소로 구성된 전 세계 추적 네트워크에서 우주선을 추적했다. 이 네트워크는 우주선에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우주 비행사와 지상 간 양방향 통신을 제공했다. 각 관측소는 1300km의 범위를 가졌으며, 우주선은 보통 7분 동안 관측소 상공을 통과했다. 지상에 있는 머큐리 우주 비행사들은 우주선 통신 담당관 역할을 맡아 궤도에 있는 우주 비행사와 통신했다. 우주선에서 수집된 데이터는 고다드 우주 비행 센터에서 이중화된 트랜지스터 기반 IBM 7090 컴퓨터로 처리된 후, 케이프커내버럴의 머큐리 통제 센터로 전송되었다. 통제 센터에서는 세계 지도에 우주선의 위치, 지상 궤적, 30분 이내 비상 착륙 가능 지점 등이 표시되었다.

머큐리 지상 통제와 관련된 다른 컴퓨터로는 케이프커내버럴에 있는 진공관 기반 IBM 709 시스템(발사 중단 필요 여부 및 중단 시 캡슐 착륙 지점 결정), 고다드에 있는 두 대의 IBM 7090 트랜지스터 기반 컴퓨터의 백업 역할을 한 버뮤다의 IBM 709, 발사 중 아틀라스 로켓에 무선 지침을 제공한 Burroughs-GE 시스템이 있었다.

세계 추적 네트워크는 1980년대 위성 중계 시스템으로 대체될 때까지 이후 우주 프로그램에서도 계속 사용되었다. 1965년, 미션 통제 센터는 케이프커내버럴에서 휴스턴으로 이전되었다.

7. 1. 주요 임무

(km)근지점
(km)최대 속도
(km/h)빗나감
(km)시간장소MR-37Freedom 7셰퍼드1961년 5월 5일 14:34LC-515분 22초0188—5134mph5.6MR-411Liberty Bell 7그리섬1961년 7월 21일 12:20LC-515분 37초0190—5168mph9.3MA-613Friendship 7글렌1962년 2월 20일 14:47LC-144시간 55분 23초326116117544mph74MA-718Aurora 7카펜터1962년 5월 24일 12:45LC-144시간 56분 5초326916117549mph400MA-816Sigma 7시라1962년 10월 3일 12:15LC-149시간 13분 15초628316117558mph7.4MA-920Faith 7쿠퍼1963년 5월 15일 13:04LC-141일 10시간 19분 49초2226716117547mph8.1



비고
머큐리-레드스톤 3최초의 미국인 우주 비행.[18] 항공모함 USS Lake Champlain에 의해 회수되었다.[19]
머큐리-레드스톤 4해치가 예상치 않게 날아가면서 회수 과정에서 우주선이 침몰했다.[20] 1999년에 회수되었다.[21] 우주 비행사는 항공모함 USS Randolph에 의해 회수되었다.[22]
머큐리-아틀라스 6최초의 미국 궤도 비행.[23] 재진입 중 반사 팩을 유지했다.[24] 구축함 USS Noa에 의해 회수되었다.[25]
머큐리-아틀라스 7카펜터는 데이크 슬레이턴을 대신했다.[26] 카펜터의 착륙 지점 초과는 자동 안정화 장치의 오작동으로 인해 발생했으며, 이는 역추진이 우주선의 움직임과 일치하지 않음을 의미했다. 구축함 USS Farragut에 의해 회수되었다. 가장 큰 빗나감.
머큐리-아틀라스 8계획에 가장 가까운 비행. 기동 테스트를 수행했다. 항공모함 USS Kearsarge에 의해 회수되었다.
머큐리-아틀라스 9최초의 미국인 1일 이상 우주 비행. 마지막 미국 단독 임무. USS Kearsarge에 의해 회수되었다.
회수 변동MA6) 우주선과 우주 비행사를 직접 탑승시켰고, MA8) 우주선과 우주 비행사를 보트로 끌어다 배에 탑승시켰으며, MA9) 우주 비행사를 태운 우주선을 배로 비행시켰다.



머큐리 계획의 유인 비행은 모두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계획 도중 일부 비행은 취소되었다. 주요한 의학적 문제는 간단한 개인 위생과 비행 후 기립성 저혈압 증상이었다. 발사체는 무인 비행을 통해 시험되었기 때문에 유인 임무 번호는 1번부터 시작하지 않았다. "머큐리-레드스톤"(준궤도 비행)을 의미하는 MR과 "머큐리-아틀라스"(궤도 비행)를 의미하는 MA라는 두 개의 별도 번호 체계가 있었다. 우주 비행사들이 파일럿 전통에 따라 각자 우주선에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은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7명의 우주 비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7"로 끝나는 이름을 선택했다. 우주선 생산 번호는 임무 순서와 일치하지 않았으며, 일부 캡슐은 예비용으로 보관되거나 테스트에 사용되었다.[18] 시간은 협정 세계시(UTC)를 기준으로 하며, 현지 시간에서 5시간을 더한다.

머큐리 계획 지원 인원은 통상 18,000명 전후였으며, 그 중 약 15,000명이 회수 작업에 관여했다. 나머지 인원은 대부분 전 세계에 걸쳐 설치된 우주선 추적 네트워크에 관여했는데, 이 네트워크는 적도 상에 설치된 18개 기지로 구성되었으며 1960년대 완성된 인공위성 추적망을 기초로 했다. 주요 역할은 우주선으로부터 데이터를 수집하고, 비행사와 지상 간 양방향 통신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각 기지는 1300km의 범위를 가졌고, 우주선이 그 사이를 통과하는 데 통상 7분이 소요되었다. 다른 비행사들에게는 우주선 통신 담당관(CAPCOM) 임무가 할당되어 궤도 상 비행사와의 통신 연락을 담당했다. 우주선에서 전송된 데이터는 고다드 우주 비행 센터에서 처리된 후 케이프커내버럴의 머큐리 통제 센터로 보내져 관제실에 있는 세계 지도 양쪽에 표시되었다. 지도에는 우주선의 현재 위치와 긴급 상황 발생 시 30분 이내 귀환 가능 위치가 표시되었다.

8. 유산 및 영향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국과 소련은 핵무기 경쟁을 벌였다. 소련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개발했고, 이는 미사일 경쟁을 촉발했다. 로켓 기술 발전으로 양국은 지구 궤도 위성을 개발할 수 있게 되었다. 1957년 10월 소련이 최초의 위성을 궤도에 올리자, 미국은 "미사일 격차"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다. 한 달 후, 소련은 스푸트니크 2호를 발사해 유인 우주 비행이 목표임을 분명히 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민간 우주 기구인 미국 항공우주국(NASA)을 설립했고, NASA는 인간을 우주에 보내는 것을 다음 목표로 삼았다. 머큐리 계획은 유인 우주선을 지구 궤도에 올리고, 우주에서 조종사의 능력을 연구하며, 조종사와 우주선을 안전하게 회수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고든 쿠퍼의 테이프 퍼레이드, 1963년


머큐리 계획은 미국 최초의 유인 우주 프로그램으로, 비록 소련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국위를 선양하고 제미니 계획, 아폴로 계획, 스카이랩 등 후속 계획의 과학적 성공에 기여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머큐리 계획을 지지하여 대중적 성공을 이끌었고, 1960년대 말까지 달 유인 착륙 및 귀환 계획을 발표했다. 머큐리 계획에 참여한 6명의 우주비행사들은 훈장을 받고 퍼레이드에 참여했으며, 그 중 두 명은 미국 의회 합동 회의에서 연설했다. 버지니아주 햄튼과 버지니아주 뉴포트 뉴스의 Military Highway는 머큐리 대로로 명명되었다.[21]

2011년 2월 25일, 전기 전자 기술자 협회(IEEE)는 머큐리 우주선의 중요 발명품에 대해 보잉에 마일스톤 상을 수여했다.

8. 1. 과학 기술적 성과

NASA는 미지의 우주 환경에 인간이 처음 도전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무인 로켓 발사, 동물 실험 등을 통해 안정성을 확인했다. 이 과정에서 샘과 미스샘(두 마리의 원숭이), (침팬지), 에노스(침팬지)가 비행에 성공했다.

1961년 5월 5일 폰 브라운 박사의 레드스톤 로켓으로 앨런 셰퍼드 중령의 유인 시험 비행(탄도 비행, 고도 2000km, 비행 시간 15분)이 성공했다. 1961년 7월 21일에는 V. 그리솜이 탄도 비행을 마쳤다.

1963년 5월 머큐리 계획은 종료되었다. 계획된 비행 중 9건이 취소되었는데,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임무조종사계획된 발사취소
머큐리-주피터 1호1959년 7월 1일[19]
머큐리-주피터 2호침팬지1960년 1분기1959년 7월 1일[20]
머큐리-레드스톤 5호글렌(예상)1960년 3월1961년 8월
머큐리-레드스톤 6호1960년 4월1961년 7월
머큐리-레드스톤 7호1960년 5월
머큐리-레드스톤 8호1960년 6월
머큐리-아틀라스 10호셰퍼드1963년 10월1963년 6월 13일
머큐리-아틀라스 11호그리섬1963년 4분기1962년 10월
머큐리-아틀라스 12호시라1963년 4분기1962년 10월



머큐리-주피터는 머큐리 캡슐을 탑재한 주피터 미사일로 구성된 준궤도 발사 구성이었다. 머큐리-주피터 1호는 열 차폐 시험, 머큐리-주피터 2호는 침팬지를 태운 머큐리 우주선의 최대 동압 시험으로 계획되었으나, 1959년 7월 1일 예산 제약으로 취소되었다.[19][20]

다른 4명의 우주 비행사를 위한 준궤도 비행도 계획되었지만, 비행 횟수가 점차 줄어들어 티토프의 비행 이후 모두 취소되었다. 머큐리-아틀라스 9호는 1일 비행과 3일 비행까지 이어질 예정이었지만, 제미니 계획이 시작되면서 불필요하게 되었다.

머큐리 우주선의 설계 책임자는 NACA 시대부터 유인 우주 비행 연구에 참여했던 맥심 파제였다. 기체 높이는 3.3m, 직경은 1.8m였으며, 비상 탈출용 로켓을 더하면 전체 높이는 7.9m였다. 거주 공간 부피는 2.8m3로, 비행사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였다. 선내에는 스위치 55개, 퓨즈 30개, 기계식 레버 35개 등 총 120개의 제어 장치가 있었다. 기체 무게는 머큐리-아틀라스 9의 경우 1400kg이었다. 선체 외피는 고온에 견딜 수 있는 레네 41(니켈 합금)으로 만들어졌다.

우주선은 원뿔 모양이었으며, 선단 부분에는 목 부분 같은 것이 있었다. 바닥 부분에는 볼록한 형태의 내열 보호판이 설치되었고, 그 내부는 유리 섬유로 여러 겹 덮인 알루미늄 벌집 구조였다. 열 보호판에는 귀환 시 우주선 속도를 줄이기 위한 역추진 로켓 3기가 스트랩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역추진 로켓 사이에는 발사 최종 단계에서 기체를 로켓에서 분리하여 궤도에 진입시키기 위한 소형 로켓이 있었다. 스트랩은 역추진 로켓 사용 후 절단되었고, 불필요해진 로켓은 기체에서 분리되었다. 열 보호판 바로 위에는 가압된 선실이 있었고, 선내에는 비행사가 좌석에 안전벨트로 묶여 있었다. 비행사 눈 앞에는 계기판, 등 뒤에는 열 보호판, 좌석 바로 아래에는 환경 제어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장치는 산소 공급과 선내 온도 조절, 이산화 탄소수증기, 냄새 제거, 궤도상에서 소변 수집 등의 역할을 했다. 선단부에는 회수 장치가 수납된 구획이 있었으며, 내부에는 감속용 드로그 슈트 1개와 메인 낙하산 2개(1개는 예비)가 격납되어 있었다. 열 보호판과 선내 바닥 격벽 사이에는 에어백이 수납되어, 착수 직전에 전개하여 충격을 완화했다. 회수 장치 앞쪽에는 안테나 구획이 있었고, 통신용과 우주선 추적용 안테나 2기가 격납되어 있었다. 또한, 귀환 시 열 보호판이 제대로 진행 방향을 향하도록 자세를 안정시키는 플랩도 설치되어 있었다. 우주선 전방에 부착된 비상 탈출용 로켓에는 고체 연료 로켓 3기가 장착되어 있었다. 발사 실패 시 비상 탈출용 로켓이 짧은 시간 동안 엔진을 분사하여 우주선을 발사 로켓에서 멀리 떨어뜨리고, 기체가 해면에 접근하면 낙하산이 전개되어 착수했다.

8. 2. 사회 문화적 영향

머큐리 계획은 1957년 10월 4일 소비에트 연방이 첫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한 것에 대항해 1958년에 시작되었다.[18] 머큐리 계획은 1958년 10월 7일에 공식적으로 승인되었고, 12월 17일에 대중에게 발표되었다. 원래는 우주비행사 계획(Project Astronaut)이라고 불렸지만,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조종사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신, ''머큐리''라는 이름은 고전 신화에서 따왔다.[18]

1958년 10월 1일,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설립되어 군사 부문을 제외한 우주 개발을 육해공군으로부터 이어받아, 정부의 지원을 받아 유인 우주비행을 추진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소련은 유리 가가린을 통해 인류 첫 유인 우주비행(1961년 4월 12일)을 성공시켰다. 미국은 1961년 5월 5일, 앨런 셰퍼드가 탑승한 머큐리 3호(프리덤 7호)로 탄도 비행을 실시했지만, 궤도 비행은 소련에 10개월이나 늦은 1962년 2월 20일존 글렌이 탑승한 프렌드십 7호가 처음이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5월 15일 연설에서 1960년대가 가기 전에 에 유인 비행을 실시한다고 선언했고, 머큐리 계획의 성과는 후의 제미니 계획아폴로 계획으로 인계되었다.

오늘날 머큐리 계획은 최초의 미국 유인 우주 프로그램으로 기념되고 있다. 비록 소련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국가의 위상을 되찾았고, 제미니, 아폴로, 스카이랩과 같은 후속 프로그램의 과학적 성공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1961년 4월 12일, 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지구 궤도 비행에 성공하여 인류 최초의 우주 비행사가 되었다. 그로부터 3주 후인 5월 5일, 앨런 셰퍼드가 탄도 비행에 성공하여 미국 최초의 우주 비행사가 되었다. 미국이 지구 궤도 비행에 성공한 것은 1962년 2월 20일로, 머큐리 3번째 비행사인 존 글렌이 궤도에 도달했지만, 이보다 앞선 1961년 8월에는 소련의 두 번째 비행사인 게르만 티토프가 이미 1일간의 비행에 성공했다.

1964년, 케이프 커내버럴의 제14발사 시설 근처에서, 계획의 상징과 숫자 7을 조합한 금속 기념비가 제막되었다. 1962년, 미국 우정청은 MA6 비행을 기념하여 머큐리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 유인 우주 비행을 그린 우표가 발행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8. 3. 후속 계획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5월 15일, 앨런 셰퍼드가 탑승한 프리덤 7호의 발사 성공 직후 "1960년대가 가기 전에 에 유인 비행을 실시한다"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머큐리 계획의 성과는 이후 제미니 계획아폴로 계획으로 이어졌다.

머큐리 계획은 미국 최초의 유인 우주 비행 계획으로, 비록 소련과의 우주 개발 경쟁에서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국위를 선양하고, 제미니 계획, 아폴로 계획, 스카이랩 계획 등 후속 계획에 과학적 성공의 발판을 마련했다.[1] 머큐리 계획을 통해 비행한 6명의 우주 비행사는 훈장을 받았고[2] 퍼레이드를 했으며, 그 중 2명은 미국 의회 합동 회의에 초청되어 연설했다.[3]

1979년 톰 울프의 소설 『필사의 도전』을 원작으로 1983년 제작된 동명의 영화에서 머큐리 계획이 묘사되었다.[4]

8. 4. 기념

머큐리 계획은 미국 최초의 유인 우주 프로그램으로 오늘날에도 기념되고 있다.[18] 소련과의 우주 개발 경쟁에서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국가의 위상을 되찾고, 제미니 계획, 아폴로 계획, 스카이랩과 같은 후속 프로그램의 과학적 성공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18]

비행에 성공한 6명의 우주비행사들은 훈장을 받았고,[18] 퍼레이드에 참여했으며, 그 중 두 명은 미국 의회 합동 회의에서 연설을 요청받았다.[18]

1964년, 케네디 우주 센터 14번 발사대 근처에 머큐리 계획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공개되었으며, 머큐리의 상징과 숫자 7을 결합한 금속 로고가 특징이었다. 이 디자인은 1960년에 머큐리 우주 비행사들에게 옷깃 핀으로 처음 배포되었다.[22] 1962년, 미국 우편 서비스는 머큐리-아틀라스 6 비행을 기념하여 머큐리 계획 기념 우표를 발행했는데, 이는 유인 우주선을 묘사한 최초의 미국 우편 발행물이었다.

머큐리 계획 4¢ 미국 우표

8. 5. 대중문화

머큐리 계획은 미국 최초의 유인 우주 프로그램으로, 비록 소련과의 우주 경쟁에서 이기지는 못했지만, 국가적 자긍심을 높이고 이후 제미니, 아폴로, 스카이랩과 같은 후속 프로그램의 과학적 성공에 중요한 기반을 마련했다.[19]

1950년대에는 유인 우주 비행의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있었지만,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이 프로그램을 지지하며 대중적 성공을 이끌었다. ''프리덤 7'' 발사 당시 많은 미국인들이 라디오 중계를 듣기 위해 차를 멈췄고, 이후 최초의 궤도 비행인 ''프렌드십 7''은 1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TV와 라디오로 시청하거나 청취했다.[20]

머큐리 계획에 참여한 6명의 우주비행사들은 훈장을 받고 퍼레이드에 참여했으며, 이 중 두 명은 미국 의회 합동 회의에서 연설을 했다.[21]

이 계획은 톰 울프의 소설 『The Right Stuff』를 원작으로 한 1983년 영화 ''더 라이트 스터프'', 1998년 HBO 미니시리즈 ''프롬 디 어스 투 더 문'', 2016년 영화 ''히든 피겨스'', 그리고 톰 울프의 책을 기반으로 제작된 2020년 디즈니+ 시리즈 ''더 라이트 스터프'' 등 다양한 작품에서 다뤄졌다.

참조

[1] 웹사이트 The History of Urinating in Space https://abcnews.go.c[...] ABC 2023-12-27
[2] 웹사이트 Introduction to future launch vehicle plans [1963–2001]. 3.The Space Shuttle (1968–72) http://www.pmview.co[...] 2014-02-03
[3] 웹사이트 X – 15 Hypersonic Research at the Edge of Space https://history.nasa[...] NASA 2015-07-18
[4] 간행물 McDonnell Douglas Logo History http://www.mdc.com/v[...] McDonnell Douglas 2020-11-29
[5] 문서 Who was Alan shepherd? https://www.nasa.gov[...] NASA 2015-05-12
[6] 문서 Documents – human Space Flight: A record of ACHIEVEMENT, 1961 – 1998 https://history.nasa[...] NASA null
[7] 문서 Profile of John Glenn https://www.nasa.gov[...] NASA 2016-12-05
[8] 문서 Scott carpenter, 1925–2013 https://www.nasa.gov[...] NASA 2015-02-20
[9] 문서 40Th anniversary of Mercury 7: WALTER Marty Schirra, jr. https://history.nasa[...] NASA null
[10] 문서 Remembering Gordon Cooper https://www.nasa.gov[...] NASA 2015-02-27
[11] 웹사이트 Project Mercury Overview – Astronaut Selection https://www.nasa.gov[...] NASA 2015-03-17
[12] 웹사이트 Alan B. Shepard, Jr.: Spam in a Can? http://www.vision.or[...] Vision
[13] 논문 Work Physiology 1964
[14] 웹사이트 Gimbal Rig Mercury Astronaut Trainer http://www.nasa.gov/[...] NASA 2008-06-09
[15] Youtube Gimbal Rig https://www.youtube.[...]
[16] 뉴스 Thomas J. O'Malley, Who Helped Launch Glenn Into Orbit, Dies at 94 https://www.nytimes.[...] 2009-11-12
[17] 웹사이트 Letter from General Ben I. Funk to Dr. Calvin D. Fowler (May 14, 1963) https://richesmi.cah[...] University of Central Florida 2023-02-01
[18] 웹사이트 Project Mercury - A Chronology. Appendix 6 https://history.nasa[...] 2023-10-20
[19] 웹사이트 Mercury-Jupiter MJ-2 http://astronautix.c[...]
[20] 웹사이트 Project Mercury – A Chronology – PART II (A) Research and Development Phase of Project Mercury https://history.nasa[...] 2024-03-01
[21] 웹사이트 What’s in a name? {{!}} Mercury Boulevard https://www.pilotonl[...] 2011-10-24
[22] 웹사이트 'Pin'-nacle Achievement: The Story Behind NASA's Astronaut Pin https://www.space.co[...] 2020-01-06
[23] 웹사이트 Introduction to future launch vehicle plans [1963-2001]. 3.The Space Shuttle (1968-72) http://www.pmview.co[...]
[24] 웹사이트 Gimbal Rig Mercury Astronaut Trainer http://www.nasa.gov/[...] NASA 2008-06-09
[25] Youtube Gimbal Rig https://www.youtube.[...] NASA Glenn Research Center 2008-12-04
[26] 문서 201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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